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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내구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정치, 경제, 사회 현실에서 스멀스멀 불안을 느낀다면 이는 근본의 부실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의 궁극 목적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하나만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생각의 차이, 방법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정당정치의 본령이다.

 싸우되 배제하지 않는 것, 경쟁하되 타도하지 않는 것. 정치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 이게 전제돼야 대화와 타협이,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하지만 우리 정치판은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극단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상대를 향한 증오와 적대감을 진영의 팡파르로 삼고 있다. 나는 참이고 상대는 거짓이라는 광신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총만 들지 않았을 뿐 이런 전쟁판이 없다. 대권을 잡지 못하면 죽는다는 비장함만 흐를 뿐이다. 여기에 민주(民主)나 민생(民生)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사회는 염치와 예의를 잃었다. 우리는 지금 정치권, 경제계, 학계 등 사회 지도층의 몰염치 퍼레이드를 신물 나게 지켜보고 있다. 부조리는 모두 남의 탓이다. 탐욕의 절제가 시급하지만 아무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 학자들은 우리 사회 전반이 분노충동조절장애를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황경식 서울대 명예교수(철학)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이 국내에서 150만 부 팔렸지만, 실제 읽은 사람은 1%인 1만5,000명도 채 안 될 것으로 추정했다. 말 뿐의 '거품' 정의라는 뜻이다. 배려와 양보의 부재 속에 불통이 고질화하면서 계층 간, 세대 간 단절은 깊어졌다.

 통과의례처럼 1년에 꼭 한 차례씩 겪는 노벨상 집단 자학 시즌이 지나갔다. 일본이 22차례나 수상한 과학 분야 노벨상을 왜 우리는 받지 못하느냐고 난리를 떨었다. 일본의 과학 기술 장려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가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가진 건 채 50년이 안 된다. 먹고 살기에 바빠 돈 되는 분야에만 매달렸지 노벨상의 토대인 기초학문에 전념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는 생물학의 토대인 진화학을 전공한 대학교수가 5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진화론이 물리학처럼 자명한 과학이 된 지 오래됐는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우리 국민 가운데 10명 중 3명꼴이라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교황 비오 12세가 66년 전에 '타당한 과학적 접근'이라고 인정한 진화론을 우리나라의 일부 종교계는 이단시한다. 합리적 이성, 과학 하는 마음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경제가 아프다. 3% 성장도 버겁다고 한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2.8%로 전망했다. 2%대 성장이 이젠 '정상'이 됐다. 이것도 제 실력으로 달성한 건강한 성장이 아니다. 성장률의 상당 부분은 나랏빚과 가계부채로 끌어올렸다.

 정부가 부동산으로 경기를 떠받치면서 최근 몇 년 새 서울과 지방 대도시의 집값 땅값이 크게 올랐다. 너도나도 빚을 내 투기 대열에 뛰어들었다. 강남 아파트 값이 폭등했다.

 국채를 찍어 나랏빚을 늘리고 부동산 가격을 부추기는 건 미래 세대의 희망을 빼앗는 짓이다. 젊은 세대가 금수저가 아닌 이상 아무리 열심히 저축해도 서울에서 집 한 칸 장만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물류가 좋은 곳에 공장을 짓기도 힘들다. 부동산 가격을 올려 '미래'를 탈진시켜 놓고 그걸 성장이라고 포장해선 곤란하다.

 국가가 진퇴의 갈림길에 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내리막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구조조정을 통한 제조업 혁신을 이뤄야 했다. 미래형 전략 산업 육성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 금쪽같은 시간을 현실에 안주하며 허송세월했다. 그 사이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이 인공지능과 로봇,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우리는 후발 주자가 됐다.

 이건 일차적으로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무엇보다 IMF 외환위기 극복 당시의 국민 통합 리더십을 그 이후엔 보여주지 못했다. 혁신의 역량을 모아 분출시키는 집중력과 돌파력도 없었다. 단기성과에 급급해 미래를 통찰하지 못했다. 정치권은 싸움으로 지새우며 국력 증진의 발목을 잡았다. 입법은 규제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러는 사이 국가의 성장 잠재력은 떨어졌고,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실업과 양극화가 심화했다.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실한 주춧돌과 기둥(헌법)을 갈아 끼우고, 경제운용의 틀(성장과 분배)을 바꿔야 한다. 사람을 양식 있는 민주시민이나 시대에 맞는 인재로 키우기는커녕 망친다는 비판을 받는 교육을 수술해야 한다. 해답은 대부분 이미 나와 있다. 실행이 관건이다.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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