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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들 오해하는데 정신과의사라면 사람을 보면 한눈에 문제점을 알 것이라든가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분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 정신과 의사도 똑같이 일상을 산다. 철학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철학적 물음을 끊임없이 일상사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실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일상의 평균적 삶을 사는 것이다.

 정신과의사들 모임에서 특히 젊은 동료들은 그들 친구가 서울근교에서 근무하는데, 전셋값 올려 주는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자동차나 스마트폰 문제로 앞으로의 경제전망에 대한 걱정과, 집을 전세로 있어야 하나 아니면 집값이 떨어지더라도 집을 사야 하는 것인가도 고민하고 있었다.

 집을 살 것인가 전세로 계속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결혼을 한 사람들이고, 많은 일반 사람들은 경제적 곤란으로 또는 다른 이유로 결혼을 해야 하나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괜찮나 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유예'시키면서 계속 살기도 한다.

 이렇게 '유예'시킨다는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치열하게 앞서 가며, 자신의 '존재'가 시간에 '기획투사' 되지 못하고, '개현'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미래를 적극적으로 앞당겨 오지 못하고, 시간 자체를 미끄러져 나가게 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 존재는 항상 존재가능이 문제인 것이며, 그 존재 가능을 떠맡지 않으려는 것은 아닌지 싶다.

 인간은 결코 그가 지금 있는 대로가 아니다. 인간은 그가 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는바 그것이다. 그가 농부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농부로서 삶을 살 수 있다.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고, 그것이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자유란 이렇게 존재가능에서 근본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극단적으로는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인가 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까지도 결정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도 그가 술을 마시면서 자살을 결심하고 있다고 할 때, 너무 취해 버리면 자살이 어려운 것처럼, 다 선택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한 것이 아닌 던져서 있는 상황 속의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살은 죽음가능성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죽음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존재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동물이나 사물은 오직 하나의 존재방식인데 인간의 존재방식은 여러 가지 가능한 방식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런 것이 또한 삶을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복잡한 다양성이 없다는 것은 거꾸로 내가 되려고 하는바 자유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이 자유가 혹 갈등이 없는 곳을 지향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유는 갈등에 그 몸통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초월이란 이런 갈등 대극이 인접된 곳에서의 작용이며, 갈등을 떼어 놓으면 그 초월 기능도 멈추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아래로 대치되어있는 폭포에서야 삶의 터빈을 돌릴 수 있는 것처럼 삶의 갈등은 인간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갈등의 한복판에서야 우리가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거나 또는 '실존'의 가장 고유한 극도의 가능성들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본래성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우리 삶이 비본래적 일상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신과 의사이거나 철학자라도 그들의 사유는 결국 일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삶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자아가 무엇이고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현대철학에서도 아직 수수께끼이며, 그 자기를 알기 위해 자아에 대한 고유한 관찰이나 첩보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우리의 고유한 자기는 세계 자체에 직접 열렬하게 빠져들어 있는 가운데 사물들에서부터 반영(反映)되어 비추이고 있다는 것이다. 구두장이는 구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의 구두로부터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 이런 사물들 사이에서 열렬히 몰입해 있는 자신을 가짐이 '진짜'이며, 오히려 영혼 속을 과도하게 후벼 파는 시도는 거짓될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 삶에 대한 열정, 그리고 애착이라는 것이 아무 이유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것의 '객관적' 모습을 보려는 정신과의사나 철학자라도 일상(everyday)의 삶에서 뿐 달리 그것을 끌어낼 곳을 발견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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