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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아버지
                                                                     최금진

살금살금 은행 천장에 붙어 있다가
금고까지 가느다란 거미줄을 치고
서커스 단원처럼 돈다발을 꽁꽁 묶어 줄에 달고 휙, 휙, 휘익
야호, 얼마나 갖고 싶었던 돈다발인가
우리 아버지가 돈을 훔쳤어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우리들의 생계를 위해 저래도 되는 걸까요
아버지의 이율배반을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똥구멍에서 나오는 끈적끈적 거미줄을 되감으며
춤추고 재주를 넘고
땡전 한 닢밖에 없는 빈털터리 보름달 영감에게까지 들리라고
긴긴 겨울밤 투전에 눈 뻘게진 토끼들도 들으라고
이제 새로운 백만장자가 납신다고
아버지는 새끼들을 위해 변종이 되고, 괴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겐 영웅인 걸요
당신들 집에 쌓아놓은
금 두꺼비, 다이아반지, 미국 달러, 일본 엔화
슬슬 줄을 당기기만 하면 모두 아버지의 것
전에 미리 봐두었던 남태평양 휴양지와 상큼한 미래를 위해
꼭 먹고 싶었지만 이름도 생각 안 나는 과일들을 위해
아버지는 줄을 타고 날아요
주렁주렁 꽁무니에 달려 나오는 해공 같은 죄책감 따위는
거대한 십자가 교회와 무덤에게 줘 버리고
그래요, 우리 아버지는 도둑놈이 되었어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회의 악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 누군가가 저질렀을 일을
우리 아버지가 솔선수범 하셨어요
지금은 비단실 같은 달빛 내리는 감옥에 가 있는 아버지
거기서도 거미줄처럼 몽상은 끝없이 퍼져나가고
아버지의 상상은 여기저기 줄을 타고 막 날아다녀요
자력구제가 금지된 민주사회에서 반신반인이 되신 아버지
스파이더맨은 제 그물에 제가 갇힐
그 최후의 자세를 생각할 뿐, 아아
아버지, 당신이 물려주신 정체성은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멀지만
앞집 아이가 울 때, 그 집 아줌마가 아이를 재우고 혼자 울 때
쉭, 쉬익, 손바닥에서 거미줄을 날려
저 거대한 금빛의 달덩이를 우리에게 포획해 주세요


●최금진 시인 -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이 있다. 2008년 오장환 문학상 수상.


 

권기만 시인

최금진의 시는 가난한 자의 허기에 깊이 닿아 있다. 약하지만 악착같이 살아야만 하는 이웃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다. 선한 사람이 사회의 악이 되는 무능을 눈물 나게 그리고 있다. 그래요, 그래요, 라고 긍정으로 반문하면서 타령의 반추를 넣고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하다는 듯 스파이더맨을 데리고 와서 슬프고 가난한 자의 희망을 변주하고 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아주 비상한 방법으로라도 희망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으르고 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속담을 연상시키는 스파이더맨은 그래서 더 리얼하다. 스파이더맨의 세상인 웹은 가상의 거미줄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다 만들어서 공유할 수 있다. 줄과 선으로 된 세상을 예언한 말이 인연이라는 그 지독한 핏줄을 아버지는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악용한 해커들이 거미줄을 쳐놓고 무심코를 날름 먹어치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온갖 가상의 천국을 만들어서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위한 죄책감은 누가 만든 것일까? TV에서만 본 남태평양 휴양지와 과일은 언제 배달되는 것일까? 변종과 괴물이 어째서 더 친근한 우리 이웃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들은 무슨 수라도 써야하고 아이들은 안전하게 그런 걸 모르고 커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참으로 정직하고 기구한 소망인 것이다. 그리하여 몽상과 희망과 슬픔과 죄책감이 종횡무진 거미줄을 치고 있지만 제발, 어리석은 희망이라도 걸려들기를 기필코 빌어야 하는 밤, 눈물은 드디어 행간에서 거대한 금빛 달덩이로 떠오른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손바닥에서 쉭, 쉬익, 거미줄이라도 날려서 그것을 힘껏 포획해야 하기 때문이다.
 권기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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