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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와 붙어도 절대 지지 않을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소개한다.
 친구 한 명,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의 백발 노파지만 책이 있어 행복하기만 한 할머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 도시생활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시골행 기차에 짐을 싣는 할머니. 책과의 진한 연애를 위해서라면 사막 한복판에라도 짐을 부릴 할머니다.  
 리자니, 제인이니, 마가렛이니, 로즈니 이름이 궁금하지 않다.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만으로도 존재에 번쩍번쩍 광이 난다. 그러나 번쩍이는 존재 이면에 도사린 시골 생활은 녹록지 않다. 외딴 셋집에 이삿짐을 들였지만 기다리는 건 일, 일, 일이다. 봄내 길 잃은 어린 양을 돌봐야 했고, 여름은 과일 따는 일로 소진했고, 가을은 잼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가뭄으로 대지는 탔고, 펌프물에 의지하지 않곤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는 고통의 여름을 나야했다. 가을장마까지 겹쳐 '할매의 책 읽기는 물 건너갔구나!' 단정 지을 즈음 할머니가 그토록 염원하던 시간이 찾아온다.
 책만큼 많은 짐승들, 짐승들만큼 많은 책 낟가리에 파묻힌 할머니. 행복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다. 낟가리 꼭대기에 우주선이 된 청거북, 한쪽 어깨에는 앵무가, 다른 어깨에는 수탉이, 낟가리 옆구리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는 뱀, 책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코알라 영감님, 이구아나, 키다리 타조 청년, 빨강 립스틱 짙게 바른 흑고니 아가씨, 알 까는 거위 엄마, 장식장 서랍을 독차지한 생쥐가족, 돼지, 오리너구리, 토끼…. 겨울동안 짐승들과 한집 거처를 하는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마지막 페이지의 '읽어야할 책들'이라고 쓴 메모지가 나를 긴장시킨다. 
 '버드나무에 부는 사람, 비밀의 화원, 걸리버 여행기,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우연히 찾아오다, 겨울 이야기, 험프리 클린커, 올리버 트위스트, 일곱 명의 작은 원, 엘리노어 엘리자베스'
▲ 남은우 아동문학가
 시골 살이를 계획하는 10년 뒤 2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본다. 배추밭 머리에 시집이 쌓여있고, 호박 반 그림책 반 실은 유모차를 밀며 골목길을 활보할 은우 할매 모습에 웃음이 난다. 펑펑 눈 내리는 겨울밤, 짐승들 누구누구가 와서 책 읽기 대결을 펼치고 있을까? 고양이, 개,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꿩, 올빼미, 토끼, 다람쥐 모두 모두 와 있기를.  훌훌 도시를 털고 시골에 책들을 데려갈 날! 진짜 행복하겠다.
 남은우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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