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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저녁이었다. 하늘엔 노을이 타는 듯 붉었다. "와, 정말 곱다. 꽃밭 같네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옆에 있던 선배가 한마디 했다. "너는 저 노을을 보고 꽃을 떠올린단 말이냐? 나는 각혈하는 여공들의 붉은 뺨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대상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나는 반발심이 생겼다.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도 못하나요?' 라는 말을 속으로 눌러 참았다.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샛노란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선 것을 보자 두 가지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래 전국을 뒤덮었던 노란 리본의 물결과, 연이어 노을을 보고 여공의 각혈을 떠올린다는 대학교 때 선배에 대한 기억. 그때는 자연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소위 '의식화' 하는 선배에게 반발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선배의 말을 어쩌면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 세월호가 있다.

온 나라 사람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린 2014년 4월 이후, 산수유든 은행나무든 아름다운 황금빛을 보면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고 난 뒤 어김없이 아아, 하는 탄식이 뒤따른다.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감탄 뒤에, 성황당에 걸린 헝겊처럼 분향소 근처 가지에 걸려 나부끼던 노란 리본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휴학을 하고 공장 노동자로 현장에 들어갔던 선배는, 꽃 같은 아이들이 먼지 속에 미싱을 돌리다 각혈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가슴 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노을이든 장미든 붉은 색을 보면 그 아이들을 떠올렸을 테고. 그리고 내가, 이제 그만 되었다고 서둘러 커튼을 치고 막을 내리려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듯, 그저 아름답구나 하고 바라보는 것을 감상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나의 이해는 시간의 힘이 아니라, 선배의 말을 잊지 않고 오래 되새겨온 기억의 힘이다. 시간은 감각을 무뎌지게 하지만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처음의 상태, 생생한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기억한다는 것.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긴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의 태도와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기억에 관한 인상적인 시가 있다.

러시아의 망명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가 쓴 '시에 대한 정의'. "우리가 사랑에 이끌려 나오는 순간/ 눈은 얼마나 천천히 내리는지/ 기억해 두는 것/ 우리가 가까운 이에게 사랑을 상기시키는 순간/ 축축한 아스팔트 위로 깔려진 하늘을/ 기억해 두는 것…/ 그리고 새벽녘이면/ 호위병들이 돌아서 나오는/ 하얀 길을 기억해 두는 것/ 호위병들의 낯선 목덜미 위로/ 태양은 어떻게 떠오르는지/ 기억해 두는 것" 이 시는 브로드스키가 스페인 내란 중에 파시스트에 의해 죽음을 당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추모하며 쓴 것으로, 로르카는 총살당하기 직전 병사의 머리 위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래도 여전히 태양은 떠오른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브로드스키는 그것을 '시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진은영 시인은 모 일간지에 이 시를 소개하면서 "사랑의 순간뿐만 아니라 고통과 절망, 폭력을 부르는 순간까지도 낱낱이 기억하는 것, 그러고도 감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세상에 대한 가장 시적인 정의이다"라고 평을 하였다.

요컨대 시는 환희와 고통, 승리와 패배의 순간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고, 우리 일상에서 포착된 그러한 순간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기억은 시간에 대한 저항이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커다란 낫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시간의 낫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무로 돌아가게 만든다. 서슬 푸른 시간의 낫질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 그 갈라진 틈바구니로 과거의 그 시간과 직면하는 것이 기억이다.

'직면' 그 순간과 똑바로 대면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지만, 그럼으로써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화 된다. 현재화된 과거는 '그래도 여전히 태양은 떠오른다.'는 독백처럼 뜻밖에 우리를 위무하고 살아갈 힘을 준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힘.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 인물은, 그 사건은, 그 시간은 살아 있다. 우리의 삶은, 시대는, 역사는 시간 위에 쌓아올린 기억의 층위이다. 올바른 기억만이 왜곡되고 뒤틀린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오랜 갈등 끝에 안산교육청 별관으로 이전한 세월호 기억 교실이 일반인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그리고 윗분들의 뇌리에 사라진,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세월호 7시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기억합니다' 라는 온라인 기억 사이트도 생겨났다. 평범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날 같이 뉴스를 보던 직원들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사람이라면, 특히 부모라면 그날 7시간은 잊을 수 없다고. 나도 적었다. "전원 구조 되었다는 소식에 다행이구나 생각하고 수업을 하러 갔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아직도 구조 중이라고 말해주더군요.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아서 불길한 느낌은 들었지만 그렇게 참혹할 줄은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꽃다운 아이들의 죽음을 되새기는 일은 가슴 아프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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