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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김장 전
[에세이를 읽는 금요일]정임조 아동문학가
2016년 12월 15일 (목) 19:27:19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정임조

어쩌다 보니 여태 김장을 못했다. 김치는 남들 곱절을 먹으면서, 입에 맞는 김치에 꽂히면 속이 아릴만큼 먹어대면서 태평스레 손 놓고 있다. 아파트 음식 쓰레기통에 가득한 김장찌꺼기를 보면 김장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빈방에 켜지는 엘이디 전구처럼 번쩍인다.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김장 그거 당장이라도 시작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나는 결코 김장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부터 자백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한심한 이야기지만 이 나이 되도록 김치를 담아본 적이 없다. 김장철이면 언니들이나 엄마한테 빌붙어 손가락 까딱까딱 거리며 돕는 시늉만 하다가 양동이 가득 얻어오곤 했다.

그런데 올해부터 김장 공급원이 뚝 끊겼다. 엄마는 몸져누우셨고, 언니들은 나이가 들어 동생 김장보다는 며느리네 딸네 김장 해주러 다니느라 바쁘다. 어쩌다 보니 나는 우리 자매들 사이에 밉상스런 김장 왕따로 등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김치 담그기에 영 무지한 것은 아니다. 자취 시절에는 엉터리 깍두기를 담아본 적이 있고, 어깨 너머로 배운 것도 있는데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담아본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요리사의 손맛은 없지만 요리사의 입맛을 지녔다고 떠벌리면서 얌체같이 여기저기서 얻어먹던 좋은 시절이 끝나는 즈음에 김장철과 딱 맞닥뜨린 것이다. 

요 며칠 부쩍 추워진 날씨에 신발장 깊숙이 쳐 박아 놓은 부츠까지 꺼내 신고 나니 김장을 못한 것이 수북이 쌓인 숙제처럼 부담스럽다 못해 불안하다.주변 성화도 있고 해서 마침내 김장 담그기 대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맨 먼저 알아본 것이 절임배추다.

절임배추가 시중에 판매된 지는 제법 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장 맛은 잘 절여진 배추가 좌우한다는 말에 먼저 절임배추부터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치우나 연구하는 차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된 광고를 보았다.

절임배추와 양념을 세트로 파는 것이었다. 택배로 받아 양념을 절임배추에 치대기만 하면 된다는 말에 그것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고 아예 김장 김치를 대량으로 파는 곳도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요즘 김치 사먹는 일이 흉도 아니다 싶어 이번 첫 김장은 대충 사먹어야겠구나 싶은 순간 라디오에서 우울한 뉴스를 들었다.

김장업체의 원산지 속이기, 불결한 위생 상태, 그리고 함량 미달!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풀리면서 다시금 고민이 시작됐다.

김치를 사먹겠다는 야무진 다짐이 와르르 무너졌다. 적발된 업체가 몇 백 군데가 넘는다는 끔찍한 보도에 맨손으로 김장하기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춧가루에 톱밥을 섞어 양을 부풀리고, 종이박스로 만두를 만든다는 중국에서 들어온 채소들로 만든 김치가 오죽 할까 싶어 간이 떨렸다. 좀 힘들면 어때서.

소중한 내 가족들 겨우내 맛있게 먹을 김장 좀 힘들게 하면 어때서 하던 살림꾼 둘째 언니의 톡을 읽고 보니 내 생각이 싸구려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김장은 돌아오는 주말에 언니들을 불러 저녁을 대접하고 일손을 빌리기도 했다. 톡으로 받은 김장 재료를 시장에서 구입해 놓고 나면 언니들이 산타클로스보다 반가이 찾아와 김장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리라 믿고 있다. 

올해는 글렀고 내년부터는 좀 더 연구해서 제대로 된 맛을 내리라 다짐하면서 내가 먹고 자란 김치를 떠올려본다.

작고 볼품없는 배추로 담근 배추김치. 돌보지 않는 텃밭에서 꿋꿋이 자란 부추로 담근 부추김치. 벌레한테 반쯤 뜯긴 열무로 담근 열무김치. 어릴 적 내 종아리보다 가느다란 무로 담근 동치미. 엄마는 특별한 김치를 담아내는 재주는 없었다.

밭에서 자연이 제 마음대로 길러낸 재료에 부족한 양념으로 대충 버무려 낸 그것을 지상 최대의 찬이라 여기며 먹고 자랐다.

지금처럼 갖은 양념으로 풍미를 자아내지 못했지만 일년내내 김치가 떨어지지 않게 수시로 김치를 담그신 엄마를 생각하면 혼자 하는 김장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 부끄럽다.

나는 정말 김치만 먹고 자린 것처럼 많은 김치를 먹었다. 김치는 못 담그는 게 어지간히 먹네 하던 언들의 핀잔도 어지간히 들었다.

김장을 담그지 못한 겨울이 무심히 깊어간다. 올해는 틀렸고 내년에 오리지널 김장을 하고 나면 나는 진짜 어른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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