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필자의 한 환자는 그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그를 화장실에 데려가서 고문하는 환각 경험을 하고 있다. 고문하는 자들이 나에게는 지각되지 않고 환자에게만 지각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아 있었던 진료실이 환각 속의 화장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이 맞는 것일까. 환자를 치료해야하는 입장에서는 화장실이 더 긴급한 정신적 현실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세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산다는 것은 또한 무엇이며 그리고 이런 질문을 다루는 철학은 무엇인가.

이런 철학에 스캔들이 있다고 말한 이는 독신으로 살았고 여자를 '무서워했다'고 하는 칸트였다. 그는 그의 시대에 우리의 외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증명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 스캔들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비록 그것이 '나의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하여 밖의 세계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기는 데카르트는 감각이 우리를 속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나 자신 밖에 있는 물질의 현실 예컨대 의자를 증명하지 못한 것을 스캔들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스캔들이 아니라 그런 증명을 반복하여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이라고 이야기하며 그것을 증명하려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잘못된 결점이 있다는 것인데, 첫째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둘째는 세계에서의 사물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에 무슨 경계가 있어 세계가 나의 외부인 것인가, 내가 세계 없이 그냥 '주관'으로서 떠도는 소프트웨어 같은 것이 아니잖은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어떤 노란 집을 본다고 할 때에 그 노란 집은 관찰자의 망막에서의 신경 흥분이 뇌의 상부로 전달되어 거기서 감각적인 지각으로 기록된 그런 인식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지각이 이루어지는 동안 우리 자신은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우리 감각의 '의식' 내에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표피로 경계 지어진 신체 내에 있었던 것인가, 이렇게 세계 없는 주관 속에 머물고 있었던 것은 아니잖은가. 그런 노란집의 감각 지각이 칸트가 말하는 정말 노란집이라는 '물자체'를 증명하게 해줄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시키고 있는 게 아닌 것인가.

우리 정신과에서의 조현병 환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을 착각하기도 하고, 환청, 환시 등 환각을 갖기도 한다. 앞에서의 환자의 환각을 그것이 현실에 없는 것의 경험이니 무시하라고 그렇게 말해주면 끝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환각에서의 정신적 현실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고통이 무시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닌 것이며, 실제 현실과 똑같은 '에너지'가있는 체험이고 고통이다.

환각에서의 장소라도 그것은 엄연히 인간의 삶의 장소이며 그곳에서의 친구와의 관계도 분명 보살핌에 의해서 그 상처가 치유되어야 하는 인간의 활동 영역인 것은 맞지 않은가. 만약 그가 꿈에서 어떤 계기로 하여 그 친구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자신의 감정의 변화를 경험했다면 그 경험으로 하여 실제 현실에서의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분명 변화가 생겨날 것이기에 말이다.

우리의 세계란 그런 것이고 그 세계가 꿈속이라고 해도 그것은 세계 없는 그냥 '주관'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는 꿈에서건 현실에서건 그렇게 친구들과 더불어 있다. 더불어 존재한다. 그 공간에서 세계 내에 드러나서 혹 화장실 바닥에서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얼굴에 실제 변이 묻혀 지는 행동 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라는 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현실에서 뿐이 아니라 꿈속에까지 그것도 화장실에서의 행동관계로서 친구들이 그에게 출현되는 식으로, 인간 실존 장소는 꼭 우리의 신체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거기는 우리의 비 객관적인 마음의 세계까지도 포함되는 곳으로 뇌 속에서 작용이 일어난다고 해서 뇌 속에만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 장소를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빈터'라는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그곳은 우리의 이해의 빛에 의해 조명되어지는 전체적 삶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것들에 속하는 관계들의 전 영역을 통해서 확장되는 삶의 장소이다. 그 세계에서 사는 우리의 이해의 빛과 빛에서 드러나는 사물들과는 직접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 우리는 단지 실제적 관계로서 존재할 뿐이고 만약 더불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삶도, 사건도, 그것을 비추는 조명도 의미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밖에서 마차 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은 마차소리이지 마차소리가 우리 뇌로 전달된 '순수음'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나무를 봤다면 그것은 나무를 본 것이지 나무라는 사고(idea)를 본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그 마차와 나무의 세계를 직접 돌보는 존재이고 그 존재에 대한 이해로서만 즉 실존적으로 조명된 인간일 때만이 사물들이나 인간의 정신의 빛 속에 있는 실존적 가능성들에 접근할 수 있고 반면에 그렇기 때문에만 어두움 속이나 망각과 억압의 정신적 어둠 속에 우리의 가능성이 감춰질 수 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