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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마키나'(Ex Machina, 2015) 영화 속 장면. 인공지능 로봇 개발자인 '네이든'은 로봇 에이바가 보이는 사랑에 대한 감정이 프로그램으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인공지능 스스로 깨달은 것인지 '칼렙'과 언성을 높이다 커다란 그림이 걸린 벽으로 끌고 간다. 아는 그림이냐고 물으며 이것을 그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다시 묻는다. 그 벽에는 가볍게 1억 달러가 넘는 돈으로 경매된 작가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그린 것이 아니라 물감을 들이 붓거나 막대기로 휘휘 뿌린 것이다. 아무리 형태나 연상되는 형상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소위 '뿌리기(dripping)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미국의 건국이념인 평등과 자유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미국의 자존심, 잭슨 폴락이 그린 것이다. 그는 유럽 영향을 벗어난 미국이 만든 최초 작가, 가장 미국인다운 작가, 미국 땅을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인생을 다룬 영화에서도 그려졌듯이 그는 심각한 알코올중독자였다. 거기다 우울증까지 앓았다. 44살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죽을 때 옆자리에는 부인이 아니라 애인이 타고 있었다.  

 그림은 무엇인가를 그리는 행위이다. 그 결과물을 통해서 목표 혹은 의식,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행위이다. 그렇다고 이런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경계를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런 노력은 오히려 예술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에, 예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다. 어쨌거나 폴락은 기존 예술가들이 답습한 규정과 관습을 무너뜨렸다. 누구도 그림이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행위로 말이다. 그는 술에 절어 연회장에서 소변을 보거나, 여러 명의 애인을 두고 있었던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지만, 의식을 회피하고 무의식에 의존한 미술가라는 평으로 20세기 대표작가가 되었다.   

 그림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주제가 보통 가운데 자리하고 그 주변은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소재가 등장한다. 이것은 서양미술이 가진 기본 중에 기본 법칙이다. 그런데 폴락의 그림에는 중심과 주변이 없다. 화면의 모든 부분이 평등하고 거기에는 어떤 제약도 없다. 천의 크기대로 얼마든지 그림을 크게 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이것이 광대한 미국의 대지와 미국의 건국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표현한 것이다. 그 스스로는 이런 평가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말이다.

 엑스 마카나에서 네이든은 "의식을 가지면 한 점도 찍을 수 없다. 이런 그림은 그릴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린다는 행위는 무의식에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잭슨 폴락, 가을 리듬(30번), 캔버스에 유채, 266.7×525.8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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