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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재

무딘 손으로 무채를 썰고 있던 아내가
무 하나를 뚝 잘라 무두일미를 맛보라 한다
무심결에 무를 먹고 있노라니
무성산 고랭지 채소밭이 눈에 보이고
무 잎같이 푸른 소년 하나 보인다
무시로 솟는 배움의 열망 감당할 수 없어
무작정 가출할 여비를 마련하려고
무성산 산마루를 오르내리면서
무단을 져 나르고 있다
무를 짊어진 다리가 이리저리 비척대는 동안
무가 양 어깨에 무청 같은 얼룩을 남겨 놓았다
무성산을 떠나왔지만 불빛
무성한 도시에도 그가 찾던 배움의 길은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소화하며 살기로 했다
무시로 공치는 비철에는
무위도식하는 백수를 길들이기 위해
무 한 접을 리어카에 싣고 난전으로 팔러 갔다
무도회장 앞을 지나온 탓일까
무가 모두 바람 들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해야 즐거울까 내일을 걱정할 적에
무채를 썰고 있던 아내가 무 한 조각을 건네주며
무맛이 단가 쓴가 맛보라 한다
무미건조한 무를 씹고 있노라니 또다시
무성산 화전이 펼쳐지고
무서리 떼 다녀간
무장다리 밭에는 무꽃이 한창이다
무한 꽃차례 기다리는 눈들이 여럿이다

(2014 대구문학상 수상작)

● 이은재 시인 - 1994년 대구문학(수필) 2012년 월간문학(시) 등단. 2014년 제32회 대구문학상, 2016년 제15회 국제펜아카데미문학상 수상.
 


 

박성규 시인

한동안 월동준비에 바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먹을거리를 대부분 구입해서 사용했었지만 시골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먹을거리만큼은 자급자족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봄부터 지금까지 부산을 떨며 준비한 것들이 꽤 준비되었다.
 먹을거리를 준비함에 있어서는 내 자신이 일의 주체가 되어 해야만 했다. 예전에는 부모님께서 준비하시던 과정에서 도와드린 것 전부지만 스스로  준비하다 보니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했다. 부모님께서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준비하셨던 일들을 생각하니 새삼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김장을 담근 후 남은 무로 채를 썰어 말렸다. 훌륭한 오그락지가 되었다. 올 한해를 지나오는 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오그락지 무침이었다.
 이은재 시인의 작품 '무'를 대했을 때도 그랬다. 도회지 생활을 청산하면 스스로 먹을거리를 준비하면서 살아 보겠노라고. 행의 시작이 전부 무로 되어 있어 특이하지만 무에 관한 추억 또는 삶의 흔적을 느끼는 순간 오그락지의 환상이 떠나질 않았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채 썰고 계시는 어머니 옆에서 속무 한 조각 얻어 씹어 먹었던 유년시절의 겨울밤이 그립다. 그래서 오그락지에 대한 염원이 더 간절했던 것일까?  박성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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