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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은유
                                                                    황동규

이제 무얼 더 안다 하랴.
저 맑은 어스름 속으로 막 지워지려 하는
무릎이 안개에 걸려 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저 조그만 간이역.
안개 밖으로 잘못 얼굴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
들켜서 공중에 떠 있다.
한 줄기 철길이 숨죽이고 있다.
아 이 찰나 이 윤곽, 어떤 추억도 끼어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윤곽 모서리가 순간 예민해지고
눈 한번 감았다 뜨자
이 가벼운 지워짐!
이 가벼움을 나는 어떤 은유,
내 삶보다 더 X레이 선명한,
삶의 그릇 맑게 부신, 신선한 물음으로
받아들인다.


● 황동규 시인 - 1938년 서울 출생.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어떤 개인 날''풍장''꽃의 고요'등 발간.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 류윤모 시인
겨울 여행은 주변 풍경과 동화되는 옷차림으로 떠나는 것이 제격. 한줄기 바람이 되려면 바람의 색깔을 껴입어야 한다.
 우중충한 입성에 작은 배낭하나 둘러메고 덜커덩 덜커덩 밤기차의 분절음에 기대어 잠을 횡단해 가는~ '땅콩이 있어요''맥주가 있어요' 홍익요원의 수레소리에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보면 닿던 영주 희방사역이나 봉화 승부 역.
 비로소 낯설고 물선 간이역에 내려서면 서늘하게 밀려들 새벽안개 자욱한 풍경이 이방인의 가슴 속으로 사무쳐 올 것이다.
 이미지 과잉이나 아예 감수성을 횡단해가는 자폐적인 시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중진시인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극 서정의, 치사량의 절제된 이미지와 사유의 깊이. 따따부따 해석하지 않아도 일별로도 절로 마음에 새겨지는 시가 아니겠는가.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되고 마는 돌부처의 시간에  비추어 촌각을 살다가는 인생들이 마구잡이로 짓고 허무는 것에 대한 물음표가 담겨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존재감을 무르팍으로 견디며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조그만 간이역의 윤곽을. 사라짐이 더 안타깝도록 존재와 소멸의 지점을 딱 짚어, 방만하게 보여주지 않고 망사 커튼 드리워진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일단을 슬쩍 보여주는 것만으로 독자들을 감질나게 한다.
 속치마를 슬쩍 걷어 올리는 여인이 도발적이듯… 장삼이사들의 소중한 추억까지 패키지로 앗아가는 부재와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을 시인은 암실에서 고스란히 현상이라도 해 두고 싶었을 것.
 속도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은 찰나~의 눈부신 날들까지 속속 삭제해 나가고 있다. 그 빈자리에 비정한 쇠붙이들의 거침없는 속도만이 오갈 뿐. 
 이 겨울, 철길을 탯줄처럼 드리우고 어딘가 남아있을 간이역을 아주 이 땅에서 사라지기전에  망막에 새겨두기 위해 훌쩍 떠나고 싶다.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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