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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김광련
 
운동복 차림으로 모임에 갔더니 평소 잘 아는 박 시인이 웃으며 운동 간다며 왔죠? 라며 요즘 참 보기 드문 사람이란다. 집 밖의 나보다 집안의 나를 더 좋아하시는 시부모님께 다 고할 순 없지 않는가, 열흘 전 모임이 있어 반듯하게 차려입고 노래방 갔다가 밤늦게 살금살금 현관에 들어서는데 -세상이 험하다 일찍 다녀라- 한마디 하시며 졸린 눈 비비며 안방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님. 피 들끓는 젊은 며느리 외출할 때마다 고하면 마지못해 허락은 하시겠지만, 때론 거짓말이 참말보다 예쁘지 않은가, 지금쯤 어머닌 다디단 단잠을 주무실 것이다.

●김광련 시인- 2006년 '한비문학' 신인상 등단, 한국문인협회, 울산문인협회, 시낭송가,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다.

 

 

▲ 황지형 시인

'다디단 단잠을 주무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돋보인다. 어머니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엄마와 바꿀 수 없었던 유년의 시절 내 안의 안정된 의미작용은 무한으로 변신 할 수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온갖 사물로 변신 하는 것은 조금은 쓸쓸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쥐도 새도 몰라서 안도의 한숨을 쉴 수도 있었다. 엄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고 내가 행복하면 엄마도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 사는 엄마 때문에 못살겠다고 생각하는 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다.
 엄마와 어머니의 의미를 인식하는 방식은 고양이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가족들이 다 귀가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어머니에게로 살금살금 미끄러져 들어간다. 어머니의 행복이 되는 일상에 밑줄을 그려 넣음으로써 무너지지 않는 행복을 극대화 시킨다.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 독립성과 활동성의 움직임은 행복이라는 고정점에 의해서만 일시적으로 멈칫한다. 관심을 보이면 슬쩍 딴청을 피우고 시선을 돌리는 고양이처럼 어머니와 나의 유동적인 관계는 충분한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미끄러지는 의미작용의 운동은 끝없이 계속되고 시인의 높은 경애는 가정이라는 성역에서 용해된다. 황지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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