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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잠출 편집위원

벌써 2월이다. 1월은 어찌 그리 빨리 가버렸는지. 2월은 또 얼마나 짧게 지나갈런지. 지나고 나면 모든 세월은 빠르게 지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장자는 인생의 시간을 '잘 달리는 흰 망아지를 문틈으로 보는 것(白駒之過隙)'과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울산의 분야별 지표를 보면 모든 면에서 추락하기만 했다. 한 때 한 나라의 전체 수출액과 맞먹던 울산 수출은 7년 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600억 달러 대로 급감해 산업수도 위상이 무색해 버렸다. 도시인구도 유출을 거듭해 1997년 광역시 승격 후 처음으로 전년에 비해 감소세로 돌아섰다. 주민등록상 117만2,304명으로 1년 전보다 1,230명 줄었다.
 각 구군의 '경제활동친화성'도 전국 최하위권이었다. 지역 지자체들이 기업하기 좋지 않은 환경을 갖췄다는 성적표이다. 울산의 실업률과 청년실업률은 역대 최고치를 나타내 고용상황이 전국 최악이었다. 울산시와 지역 언론이 자랑했던 주민생활만족도 역시 1위에서 13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울산의 위험신호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제 일자리 구하러 몰려오던 울산이 아니다. 타지로 떠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다.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는 울산 경제가 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미래가 암담하니 다른 곳으로 떠날 수 밖에 없다. 

 1962년 공업센터 지정과 1997년 광역시 승격으로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던 울산이 20년만에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지금 울산의 SWOT을 분석하고 진단과 처방을 내려야겠지만 울산의 '그 곳' 또는 '거기'에 깃든 '정신'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
 그것은 '한국 공업입국 발상지' 기념비와 울산의 랜드마크인 공업탑이다.
 1962년 2월 3일. 당시 혁명정부는 현재 울산시 남구 장생포 고래로 84번지길 납도(納島) 앞 언덕빼기에서 공업센터 기공식을 가졌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내빈들이 '공업입국'의 꿈을 담은 버튼을 누르자 납도 앞 바닷물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당시 대한뉴스는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3만60명이라고 전하는데 1961년 말 울산읍의 인구는 3만3,000명이었다 하니 거의 전체 읍민이 운집했다는 말이다.

 '그 곳'은 지금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을지 모른다.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지형이 변했고 역사적인 장소도 민간 기업의 공장부지가 돼 버렸다. 1992년 6월1일에 세운 '한국 공업입국 출발지 기념비'만 남아 있다.
 비석의 뒷면을 보면 '민족적 번영과 복지를 마련하기 위한 한국 공업 입국의 출발지가 된 이곳 발파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건립합니다. 1992. 6. 1. 동양나일론주식회사 임직원 일동'이라고 적혀 있다.
 공업탑은 5년 뒤인 1967년 4월20일 울산의 발전을 기원하며 세워졌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해 울산에 산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는 다짐을 돌에 새겨놓았다.
 적수공권에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꿈과 희망을 던지며 울산을 일구고 공업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지금, 울산의 지도자들은 어떤 의지와 다짐을 하고 있을까? 울산을 울산답게 하는 것, 울산의 미래 100년을 보장할 꺼리를 찾는 고민을 하고 있을까?
 공업탑을 바라보며 50여년 전 당시 지도자들이 품었을 정신과 비전을 떠올려 본다. 반백년 울산 번영의 토대를 만들었던 그들의 각오는 지금의 울산찬가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55년 전 오늘, 2월 3일 경남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납도에서 다짐했던 그 정신과 각오를 되새기며 묻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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