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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을 위한 변명
심수향 시인
2017년 02월 16일 (목) 16:41:27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모자 하면 생텍쥐페리의 모자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보다 더 친숙하게 다가와 빙그레 웃게 하는 모자가 있다. 찰리 채플린의 모자, 그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그의 모자가 그리운 것이다. 그 모자에서 비둘기가 나오고 장미꽃이 나오고 하얀 토끼가 나오던 어린 시절의 마술사 모자. 학교 강당에서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그 검정색 모자가 그리운 것이다.

 오늘도 나는 외출을 하기 위해 모자를 고른다. 날씨와 옷과 기분을 고려하여 고르는 나의 모자. 비록 많지 않은 숫자지만 모자를 고른다는 것은 외출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므로, 이때가 나는 가장 즐겁다. 흥얼흥얼거리며 나를 스쳐간 모자들을 떠올려본다.

 기억 속을 걸어가 나의 첫 번째 모자를 만나본다. 그것은 고깔모자다. 어린 시절 유난히 병약했던 나는 바람 불면 학교 안 가고, 비 오면 안 가고, 추워도 더워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나, 하루는 외가에서 자고 오겠다고 외사촌 오빠를 따라 나섰을 때 어머니는 솜을 두툼하게 놓아 만든 고깔모자를 씌워주셨다. 그 전까지는 아무소리 없이 썼던 그 고깔모자를 그날따라 팽개치며 안 쓰겠다고 떼를 쓰다 등을 한 대 얻어맞고서야 모자를 쓰고 울면서 외가로 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끝까지 그 모자를 쓰고 외가까지 갔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내가 어머니께 최초로 대든 대단한 사건이었다. 겉은 양복천에 색은 감색이었고 안에는 부드러운 천으로 보라색 모란 무늬가 있던 모자. 길이가 길어 어깨를 덮었고, 목 뒤쪽에서 끈을 당겨 앞에서 리본으로 맬 수 있게 만든 고깔모자였다. 애기들과 남자아이들이 주로 썼고, 여자아이들은 잘 쓰지 않는 모자였지만 무척 따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모자만큼이나 따뜻한 추억이 되었지만, 친구들은 지금도 만나면 어린아이 같은 고깔모자를 쓰고 다녔던 나를 놀리며 깔깔 웃는다.

 두 번째 인연의 모자는 멋 내고 싶어 하던 아가씨 시절. 샴푸해주는 미용실이 있었고, 가끔 멋쟁이 친구들이 샴푸를 하고 왔다고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머리카락이 가늘어서 파마를 하거나 고대를 해도 얼마가지 않아 풀리었다. 커트를 해도 다른 친구들처럼 볼록한 볼륨이 아예 없었다. 그러다 등산을 가는 길에 하나 사서 얹은 빵모자가 너무 편했고, 잘 어울린다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학창 시절 내내 빵모자를 애용했었다.

 세 번째 인연의 모자는 고혈압 약을 먹게 되면서 의사 선생님께서 권한 모자였다. 변동 심한 혈압이라고 겨울철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여 모자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익숙한 빵모자를 택하였는데, 하필 그것이 늦은 등단 시기와 맞물리게 되어 오해를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시도 모르면서 모자부터 장만했다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살짝 스치는 웃음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게 필요한 모자를 남의 시선 의식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외출하는 나를 새로 온 경비아저씨가 "멋쟁이 아지매 어디 가능교"하고 나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딴에는 친근감을 나타내려 한 말이었겠지만 무척 당혹스럽고 난감하였다. 그날 오후 돌아오는 길에 아저씨를 찾아 모자에 대해 설명하면서 검은 색 안경에 대한 변명도 함께 하였다. 실은 혈압이 있어 모자를 쓰게 되었고, 난시가 심해 젊을 때부터 검은 색 안경을 쓰게 되었노라고. 아저씨의 수긍하는 모습에 용기를 얻어 만나는 사람마다 모자와 안경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느 날, 매일 아침 배달되는 말씀 한 마디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속이 찬 사람은 자신을 꾸미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랬다. 나는 속을 채울 시간에 남을 의식하고 변명이나 늘어놓았던 것이다. 내가 애용하는 나의 모자와 짙은 안경을 겉멋으로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가 필요하여 사용하고 또한 좋아하니 더 이상 모자와 안경에 대한 변명은 부질없다 싶었다. 그래서 어린 왕자처럼 중얼거리며 나를 달래며 산다. *보이는 건 껍데기에 불과해.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아.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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