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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최영주 수필가
2017년 03월 02일 (목) 19:06:41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멸치가 달려왔다. 불경기의 찬바람 속으로 몸을 틀어 향했다. 가난해져 휑해진 것 같은 세상에 멸치들이 헤적여 닿았다.

 중년 여인 네댓이 우르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일터에서 일을 하다 점심식사를 하러 온 직장동료들 같다. 벽에 붙어있는 메뉴들은 보지도 않고 국수를 주문한다. 메뉴판엔 국수, 이천 원이라고 쓰여 있다. 그 중 가장 싼 가격의 메뉴다.

 한 끼의 식사비가 이천 원이어서 저들은 마음이 홀가분한가보다. 만 원 한 장이면 화기애애하게 함께 먹은 동료들의 점심값을 척, 낼 수도 있어 한결 넉넉해지는 것 같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붉은 김치보시기 위로 날아오른다. 친한 동료들과 자장면을 먹고도 육천 원씩 하는 가격이 부담되어 일행의 식사비를 선뜻 나서 내지 못하고 달막거리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쪼들리며 사는 외로운 삶이라 서로 기대며 동기간처럼 지내는 사이에서 그득히 보내고 싶은 인정이 여과 없이 샘솟아도,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을 번번이 거두어들이곤 했을 것이다. 지금 저들은 아무리 생활이 고되어도 이천 원씩이면 나도 '밥값' 낼 수 있다고 호기가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여유로움을 멸치가 잇대어준다.

 어느 날 집 앞 길 건너에 이천 원짜리 국수집이 생겼다. 식당은 넓고 깨끗하다. 식탁 위에 비치된 김치항아리에서 김치를 무제한 덜어 먹을 수도 있다. 데친 부추와 계란지단의 고명은 흉내만 낸 듯 살짝 얹혔지만 타래진 국수가 멸치육수에 잠겨 소담스레 나온다. 국수의 대명사, 잔치국수는 멸치육수가 탄생시키지 않던가.
 국수의 거품가격을 모조리 빼고 멸치들이 오직 멸치육수로 이천 원짜리 잔치국수의 맛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섰다. 가진 것 없는 가풀막진 세상살이 속내는 비슷한 처지끼리 안다는 듯 그지없이 작고 힘없는 멸치가 버팀목으로 일어섰다.

 깊고 푸른 바다 속 물고기 중에서 멸치가 가장 작은 물고기이다. 보잘것없이 작고, 뾰족한 수도 하나 갖지 못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어 멸치들은 떼를 이뤄 힘을 낸다. 잔치국수 한 그릇의 육수도 삼삼오오 어깨를 겯고 힘을 보태야 제 맛으로 우러난다.

 하루 벌어서 하루씩, 혹은 한 달 벌어 그달을 사는 사람들은 수중에 지닌 것이 없어 쓸쓸하다. 그래서 서로 내보일 것도 없는 사정을 아는 사람끼리 곁을 내어준다. 야위어서 더욱 시린 어깨를 비비며 서러운 고생을 혼자만 하는 건 아니라고 슬픔 같은 위안을 얻는다. 그들은 멸치 떼와 참 많이 닮아 있다.  

 바닷속 세상에서 재빠르게 헤엄치고 방향을 트는 멸치 떼의 군집은 은빛 장관이다. 황금으로 들어차야 보람찬 삶만은 아니라고 멸치 떼가 찬란한 은빛으로 타이르는 듯하다. 천적인 삼치나 전갱이들과 부닥뜨려도 기죽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리더를 따르며 처한 상황과 맞서 의연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처한다. 군집의 가장자리에서 철저히 경계태세를 하던 방위의무 멸치들은 서슴없이 적에게 먹잇감이 되어주고 주위를 끌어 다른 멸치들을 지켜낸다.

 멸치의 까만 눈동자는 또렷하고 초롱초롱하다. 그 예쁜 눈으로 멸치들은 제 동족이 희생될 때 비통하게 울었을 것이다. 그래도 오직 살아내는 것만이 삶이라는 듯 방대한 종족을 퍼뜨리며 꿋꿋이 최선을 다한다. 멸치들의 힘찬 생명력 덕으로 우리 또한 멸치를 헐하게 먹을 수 있다. 그 끝에서 이천 원짜리 국수도 만들어 불황의 허기진 생활을 버텨내는 것이다. 허덕이는 삶으로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결혼도 시켜 부모로 우뚝 서는 우리네 모습이 멸치들 속에 있다. 

 멸치비늘은 갈치비늘처럼 거만하게 함부로 번들거리지 않는다. 다만 차분한 은빛으로 반짝인다. 멸치의 주눅 들지 않는 자존심 같다. 모든 물고기의 비늘은 사정없이 긁어낸다. 하지만 멸치의 비늘은 한 점이라도 떨어져나갈까 봐 멸치를 뜨는 어부들은 조바심 낸다. 볼품없는 몸뚱이의 비늘을 그토록 소중히 귀함 받는 물고기는 멸치밖에 없다. 멸치는 비늘로 가치가 좌우된다. 비늘이 완전할수록 최고 상품으로 대우를 받는다.  

 작고 작은 몸이지만 혼자서도 제 몫을 해내곤 한다. 멸치는 비늘을 갖추고 밥상에 오른다. 더위에 지쳐 식욕 잃은 여름날 반찬도 제대로 없을 때, 차게 우린 녹차에 밥을 말아 고추장에 찍은 마른멸치를 얹어 먹으면 비할 데 없는 맛이다. 그 맛에 동화되어 끝도 없이 밥을 먹으며 입맛을 찾곤 한다. 그럴 때의 멸치는 출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몸을 세워 멸치세계를 대표한다.  
 바다의 은빛 꽃다발, 멸치 떼는 은빛 날개로 삶을 퍼다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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