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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에 꽂혀있는 오래된 책을 꺼내 뒤적거리다보니 속표지에 '위로, 비전을 바라보며 위를 향하여' 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게 무슨 글인가. 하도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느 책에선가 가져온 글귀 같았다. 그 책은 영어 참고서이고, 들추어보니 수험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마 그 흔적 때문에 여러 차례의 이사에도 버리지 않고 책꽂이 귀퉁이에나마 여직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일 터인데, 예컨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와 같은 성경 구절이나,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no pain, no gain(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꿈 꿀 수 있다면 이룰 수 있다.'와 같은 잠언들이 속표지의 앞뒷면이나 여백 등에 다양한 크기와 색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것들을 읽으며 위로받고 마음을 추스린 흔적들이다.

 그러고 보면 문장이나 글 등은 어떤 온기, 어떤 생명력, 나아가 어떤 신성함까지 지니고 있어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거나, 채찍질하고 고무시키기도 한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들었다. 차 안의 소음 때문에 명확하진 않은데,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 이어 새롭게 떠오르는 말이라고 한다. 잠언이나 명언에도 유행이 있는가 보다. 어렸을 때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시구가 이발소 액자에까지 걸려 있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하던 어려운 때의 일이다. 빈곤을 대물림 할 수 없다고 자녀 교육에 온힘을 쏟던 시절엔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와 같은 고진감래류의 격언이 앉은뱅이책상 앞에 붙어 있곤 했다. 고 신영복 교수의 서체에 힘입어 '처음처럼'이란 글귀가 액자나 깔개로 소장되기도 하고,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노랫말이 위안을 주기도 했다.

 나도 좋은 문장이나 글들을 적어두고 위로나 자극을 받거나 지침으로 삼는다. 엄혹했던 시절엔 '가만히 귀 대고 들어보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이란 동요를, 아이들이 한참 자랄 때는 '눈 내린 들판을 걸을 땐 발길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하는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수첩에 적어두고 다녔다.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본 '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글귀에 매료된 적도 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니, 그 넘치는 생동감이 마음에 들었다. 소수서원 다녀온 지가 20년 가까이 되는데, 비전이나 꿈에 대해 적어두던 젊은 시절처럼 그때만 해도 뭔가 이루고자하는 도약과 상승의 욕구가 컸나보다. 하지만 요즘엔 라디오에서 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마음이 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그러나, 하지만, 그렇지만'처럼 앞말과 뒷말의 내용이 다를 때 이어주는 말,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역접관계의 접속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그러나(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른 접속사)'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가 앞뒤가 단절되고, 앞의 내용을 단지 부정하는 느낌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앞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수긍하고 긍정하면서 뒤에 가서 방점을 찍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들어간 문장에는 뭔가 스토리가 있을 것 같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다. 그러나 헤어지게 되었다'와 '둘은 사랑하는 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게 되었다'란 문장을 비교해보자.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는 어떤 이야기가 상상이 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그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역접 접속사를 보면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앞의 문장을 부정하는 부정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부정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발언엔 동의할 수 없다. 정히 그렇다면, 좀 긍정적인 문장으로 바꾸어 보자. 나는 실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나는 몹시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래도 부정적 기운이 느껴지는가. 앞 문장과 연속 된 느낌이면서도 앞 문장을 넘어서는 어떤 것.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매력이다. 그러고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나 '괜찮아, 잘 될 거야' 같은 것이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글귀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위로나 격려와 아울러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요즘 너나없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특히 청년들의 어깨에 걸린 무게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 살아내야만 하는 것. 이러한 엄숙한 당위성이나 굳건한 의지 같은 것이.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에 대해 얘기해야만 한다. 꿈을 잃어버린 세대일수록, 희망이 없는 시절일수록, 정의가 실종된 시대일수록, 평화가 사라진 시기일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희망에 대해, 정의와 평화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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