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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석호

융은 그 자신의 학파를 형성하기 전에는 프로이트의 분석기법을 사용하는 정신과의사였다. 융은 정신분석에서 특히 어린 시절 무의식적인 기억에서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으로서 치료가 되는 효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의 상징을 기호적 환원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에 의문을 가졌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과거에서의 인과 관계를 강조하는 것을 균형 잡으려고 상징적 확충을 이용하여 목적의미를 찾는 합성적 통합적 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환원적 분석적 방법이 어린 시절 기원을 통하여 신경증이 생긴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융의 합성적 방법은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며 신경증이 미래에 대하여 어떤 목적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찾는 것이라고 비교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여기서 합성이니 통합이니 하는 것이 개인의 마음의 통합을 말하는 것이지 사회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통합하는 합성은 개인의식의 무의식과의 관계로 초월기능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정신에는 갈등대극을 통합하는 타고난 역동적 과정이 있다는 것인데, 이 양쪽 대극을 포함하는 상징을 형성하게 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된다.

 이런 통합의 초월기능이 아니라면 갈등이란 것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일 뿐인 것이 아닌가. 갈등 대극은 사실 우리 주변에 어디에나 있는 것이고 집단정신에서 계속 일어나는 일상 드라마이다. 모든 전쟁 정쟁 스포츠 게임 같은 것에서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대립하는 것이 다 대극이다. 여기서 싸우고 반목하는 서로의 한쪽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 싸움에 빠져들면 사실상 그 양쪽을 다 의식에 가져가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심리적 통합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하던 대로 계속 맷돌을 돌리듯이 반복하면서 자신의 일방적 운명의 노예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이때는 싸움의 적은 계속 외부에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의 입자처럼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냥 스포츠 게임에 빠져 있는 사람에 비유할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그 게임에는 어떻게 보면 이미 통합의 드라마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각 경쟁상대자는 승리하려고 애쓰며 패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지만 한쪽이 이기려면 다른 쪽은 져야 하는 것이고, 어떻게 자기는 좋은 것만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사실 옛날 그리스에서 신에게 헌정된 것으로서의 게임에서는 원형운동장에서 서로의 경쟁상대가 사실은 통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경쟁이 있으면서 그 경쟁자들은 승리와 패배를 자신 안에 동화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러면서 내면에서 통합하는 것을 배워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항상 승리자가 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러면 대극의 전체를 경험하게 되는 기회가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표피적인 사람이 되고 깊이가 없어지며 실패란 전체에서는 한 부분인 것이므로 그 전체인간에게서는 패배가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냥 단지 어떤 것에 끌리거나 어떤 것에 거절되는 것으로서는 무엇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어렵다. 의식적인 자각은 사실상은 동시에 끌리면서 혐오스러움이 같이 느껴질 때이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서 흔히 심리적 자각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대극을 한쪽에 동일시하지 않고 양쪽을 다 끌고 가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이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 현상과 다른 것이고 사회분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융 심리학에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각이 있는 그런 개인들의 통찰이 그의 주위 환경에 영향을 주게 되며 그래서 사회가 변하려면 결국 그런 자각된 개인이 많아지는 것에 의해서라고 본다.

 그런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고 필자가 만난 두 사람의 시각을 소개하고 싶다. 한분은 오래전부터 아는 분인데 이번 재판을 통하여 기득권자들이 서로 유착하면서 공정한 게임을 하지 않는 잘못과 범법이 이번을 계기로 바로잡혔으면 좋겠다고 한다. 또 한분은 흥미롭게도 탈북민인데 진보 쪽의 말들과 행동을 보면 사실 자신들처럼 사선에 서보지 않은 안이한 것으로 정말 대한민국을 잃으면 어떤 신세가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라고 한다. 갈등 당사간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갈등의 한쪽으로 내닫는 것이 아닌 갈등을 참아내며 양쪽을 다 가져 가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가. 북한 같은 곳에는 이렇게 통합할 바탕 같은 것도 없는 사회이리라. 우리는 사실 팽팽히 맞설 수 있는 건강한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융 심리학에서는 갈등을 떼어놓으면 편할 줄은 몰라도 우리 세계로의 본연의 삶의 방식인 초월기능은 멈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 자신인 어두운 반려자 그 무의식을 의식에 통합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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