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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하신 환자분들이 특히 80이 넘으신 분들이 오실 때에는 사실 현실 삶에서 사는 방식 같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할 것이 줄어든다. 이삼십 대의 환자분들에게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것과는 분명 대조를 이룬다.

 나이 드신 환자분들이 자주 호소하시는 것 중 하나는 역시 아픈 것이다. 그리고 이젠 기억력도 떨어지고 몸도 정상이 아닌데 같이 생활하는 식구들이 그것을 이해안하고 자꾸 정상인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이 불만이라고 말씀 하신다. 그리고 힘든 것이 자신이 살아온 것이 좋은 것들보다 자꾸 나빴던 것들이 머리를 차지하여 괴로워지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젠 추억으로 살아야 하는 시기에 과거가 후회스러운 것이 된다면 괴로우신 것이다.

 이런 것 등으로 괴로워하시는 어르신들에게 항상 해드리는 말이 젊어서는 자신을 계발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숙제라면 나이 드시면 아픈 것을 잘 대접하고 치료하여서 나를 잘 보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말씀 드린다. 지금 숙제는 젊었을 때 숙제보다 더 중요한데 그것은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린다. 이제껏 살아온 것이 불만족스러워도 아픈 것을 잘 대접하면 인생에 대하여 값진 것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드린다.

 우리는 보통 젊었을 때는 살아가면서 삶에 대하여 이해가 투철한 것이 아니다. 그냥 눈앞의 삶이기 때문이다. 쫓겨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이 들어 경험이 많아진 상태에서 병 같은 것을 잘 겪어 내게 되면 그것이 자기전체(self)를 만나게 되는 계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신의 전체정신(psyche)이라는 것은 융 심리학에서는 영혼(soul)이라는 것을 포함하는 정신이다.

 칸트가 비판하는 형이상학 심리학에서 규정하는 영혼의 4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영혼은 내감에 주어진 실체로서 비물질적이고 질로 볼 때는 단순하여 해체될 수 없으며 양으로는 하나로서 자기동일성이 확보되고 양태로 보면 가능적 대상들과 관계하면서 실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자아 자신에 의해 조건 지어진 이런 범주가 다시 자아의 파악을 위해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

 융의 개념은 이런 철학적인 것이 아니고 체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으로 영혼을 기능콤플렉스로 본다. 그래서 일종의 내적 인격으로서 내면에서 진행되는 정신적 과정과 관련하여 행동하는 방식 같은 것이고 무의식에 대하여 나타내는 내적 자세인 것이다. 융은 이런 내적 자세를 영혼 즉 아니마라고 했다.

 경험적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아니마란 남자 자신의 여성성으로서 내감 즉 내적인격에 주어진 것이고 무의식적으로 밖으로 투사된다는 점이 있으며 투사되어 밖의 대상인 여성에게 맡겨져 있다가 그런 현실 속의 여인이 예컨대 죽음으로 떠나면 바깥으로 나갔던 아니마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융은 연금술에서의 장면을 인용하여 영혼의 반환이라고 불렀다. 오랫동안 아니마와 동일시하던 아내가 죽었다면 자신의 영혼 즉 아니마를 되돌려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이 안 되면 본인도 아내와 같이 무덤 속에 들어가야 할 판이고 그래서 무덤 속에서 기다리는 신랑이라는 연금술 그림도 있다.

 그래서 사실 우린 여러 경우에서 영혼 같은 그런 것을 맡겨놓았던 것에서 찾아와야 하는 일을 경험하게 될 줄 모른다. 배우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지냈던 생활 방식과 헤어져야할 때도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이젠 삶을 정리하여야 할 때에 자꾸 마음속을 떠돌며 집착되는 외적 대상이라는 것은 사실은 밖에 있던 내 마음을 찾아오는 것에는 방해가 될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마음을 투자했던 것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와서 바깥 대상과는 이별할 때이기 때문이다. 삶에 집착하면서 죽음의 존재를 외면한다면 인간 영혼의 존재를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3년 전 침몰하였던 세월호를 인양하였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추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왜냐하면 죽음 즉 시신을 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의 실종이기 때문이다.

 시신이란 쇠약해져 죽은 우리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것에 영혼이 돌아와서 새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터전을 의미하는 시신을 찾아서 그곳으로 영혼이 돌아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애도 과정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면서 떠나간 영혼에서 우리의 자아를 단련하고 순화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거쳐 순화되고 되찾은 시신으로 우리의 영혼이 돌아와야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는 여러 어려움에도 결국 인양을 선택한 것 같고 그럴 때만이 사실 사자들과 그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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