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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연세가 많으셔 보청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녹내장 말기라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의 유년시절 일상에는 항상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던 길을 지날 때나 울기등대(당시는 대왕암 공원이 아니라 울기등대라 불렀다) 벚꽃 아래에 서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할아버지의 무릎은 안전했고 등은 포근했다. 까칠까칠해서 부비면 싫어했던 수염과 자그만 손을 잡아주던 투박한 손길이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지는 그리움으로 남게 될지 그 때는 몰랐다.


 마쓰라니 마리코의 그림책 '할아버지의 벚꽃 산'에서 어린 시절 나를 만났다.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벚나무를 심었다. 벚나무가 심어진 산을 손자와 함께 오르며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 그러던 겨울날 할아버지는 병이 나고 만다. 이불 속의 할아버지는 조금씩 작아지고 손자는 부쩍 컸다. 봄이 되었지만 더 이상 손자와 산을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손자는 벚꽃 산에 혼자 찾아가 "할아버지의 병의 낫게 해주세요"라며 몇 번이고 빈다. 아이의 간절한 기도 덕분일까. 겨우 기운을 차리고 올라간 벚꽃산은 예쁜 벚꽃을 피우며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같이 신나게 놀고 난 뒤 잘 자거라 하고 잠이 든 할아버지는 영영 눈을 뜨지 못한다. 그 벚꽃 산에는 해마다 봄꽃이 예쁘게 피고 봄 축제가 시작된다.


▲ 이서림 동화작가
 온 세상에 따뜻한 눈이 날린다. 벚꽃이 피어날 땐 마냥 기뻤다가도 질 때면 가슴이 아려온다. 아련한 벚꽃을 보면 그리운 사람이 생각난다. 모든 건 피고 지는 게 자연의 순리지만 세상이 변해도 절대 변치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리사랑. 할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내 할아버지의 백발을 닮은 꽃을 보며 할아버지를 그린다. 서정주 시인이 국화를 내 누님 같은 꽃이라 했다면 나는 벚꽃을 내 할아버지 같은 꽃이라 표현하고 싶다. 오늘도 할아버지가 그리워 이렇게 좋은 봄날, 내 할아버지 같은 새하얀 눈이 세상에 푹푹 나린다. 이서림 동화작가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조팝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이팝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또 다 못 앉으면 쥐똥나무 울타리나
산딸나무 가지에 앉고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아까시나무 가지에 앉다가
그래도 남은 눈은 찔레나무 가지에 앉는다.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만 알고
성긴 머리 위에 가만가만 앉는다. - '흰 눈' 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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