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창섭
"난 위대한 화가이며,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거만한 말을 내뱉던 고갱은 주식중개인이자 화상 그리고 아마추어 화가였다. 주식시장이 폭삭 망하자 1883년, 아예 그림 그리는 일에 집중하자는 그의 생각은 자만심 때문이었고 스스로 성공할 자신도 있다고 믿었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방랑벽과 궁핍함을 벗어나려는 욕망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고흐가 동생 테오의 추천으로 따뜻한 프랑스 남부 '아를'에 아뜨리에를 만들고 고갱을 불렀을 때 그는 주저 없이 합류했다. 고갱은 이전부터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가 있었고 고흐와 친분이 두텁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특유의 거만함은 소심한 고흐의 성질을 돋우었다. 격렬한 논쟁 끝에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이들의 사이는 막을 내렸지만 두 사람은 비슷한 점도 있다. 둘 다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고, 살았을 때는 작품을 인정받지 못한 채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사후(死後)에 현대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만든 작가로 자리매김한 것도 같다.

▲ 폴 고갱, 설교 후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캔버스에 유채, 73×92cm, 1888, 스코틀랜드국립미술관, 에딘버러.


 고갱은 특이한 이력만큼 그의 작품은 일단 보기에는 특이하지 않다. 사전지식이 없이 작품을 바라보면 그의 명성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른다.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미술계를 이해하고 나면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이 작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설교 후의 환상'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인상파처럼 찰나의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상상 그리고 미술의 영원한 숙제인 예술가의 정신을 그리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이미 인정받기 시작하던 인상파의 작품들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 지향했던 세계관 그리고 그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알아야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은 그가 당시의 미술시류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예술의지(Kunstwollen)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괴팍한 행동에는 어쩌면 깊은 불안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그저 그렇고 그런 미술가로 끝날 것 같은 두려움 이런 것들이 그를 남태평야 타히티로 가게 만들었다. 원시림과 남태평양의 순수한 젊은 여인들을 그리며 예술적 원천을 발견했다. 그는 현대사회의 과시욕과 천박한 피상성에서 벗어나 유사 이전의 원시적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