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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개나무(엄나무) 잎이 알맞게 피었으니 와서 따가라는 형님의 전화를 받고 지난 일요일엔 시댁엘 다녀왔다. 설에 다녀왔으니 삼 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인데, 시댁 마을은 그새 또 변해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도로를 경계로 앞쪽이 모두 파헤쳐져 공장부지 조성이 거의 끝나고, 건물도 여러 채 들어섰다. 머지않아, 벌겋게 드러난 땅 위로 공장들이 빽빽하게 세워지리라.

 시댁은 경주 석계이다. 여러 해전부터 마을 초입에 농공단지가 조성되더니 급기야 작년인가 재작년부터는 마을 바로 앞산을 허물고 논밭을 메우기 시작했다. 상전벽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시댁 마을은 빠르게 변해서, 소나무와 바위가 많던 앞산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멀리 호계의 아파트 단지까지 훤하게 보인다. 한편으론 산을 허물고 한편으론 공장 건물이 빠르게 세워지는 중이다.

 앞산엔 마을의 대소사를 주관하던 석문사란 오래된 절이 있었다. 어머님 사십구재 날 절에 들렀을 때, 남편은 옛날 옛적 호랑이가 머물렀다는 절 뒤편의 굴과, 여덟 개의 바위가 늘어선 팔바위, 이순신 장군이 앉았던 자리라는 전설이 남아있는 또 다른 바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겨울엔 토끼와 꿩을 잡으러 다니고, 오후 수업 대신 학교 난로의 불쏘시개로 쓸 솔방울을 주우러 다녔다는 추억담을 들려주었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석문사는 절 이름이 새겨진 바윗돌만 들고 마을로 내려와서 가정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앞산 앞을 흐르던 냇가. 시댁에 올 때 가끔 들렀던 냇가에는 검은 돌이 많았다. 남편은 어릴 때, 별동별이 떨어지면 그게 냇가로 떨어지는 거라고 그걸 주우러 아이들이 냇가로 몰려갔다고 한다. 그 검은 돌이 별똥별인줄 알고 자랐다는 것이다. 결혼 초만 해도 제법 맑고 수량도 많았던 냇물은 입구에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차츰 탁해지고 물이 줄어들다가, 나중엔 내 주변에 고마리가 가득 들어차서 얼핏 물길조차 안 보이게 변하더니, 이젠 그마저도 시멘트 수로에 갇히게 되었다. 냇둑에 지천이던 나무딸기도, 수크령도, 돌콩도 사라졌다. 나는 채집 생활을 하던 오래전 조상들의 DNA가 남아있는지 나물을 뜯고 산딸기를 따거나, 메뚜기 잡는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해마다 앞산의 비탈과 논둑으로 고사리를 꺾고 아이들과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는데, 이젠 그곳도 포크레인의 삽질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땅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편은 이제 다 깎여나간  앞산 쪽을 보고 저기가 선둘넘인데, 이쪽이 회미뜰이고, 저쪽이 질고지, 저 너머가 우리 밭이 있던 갓지질인데 하며 아아, 다 사라졌구나 하고 탄식을 하였다. 이젠 그러한 지명 대신 석계농공단지와 같은 이름으로 불릴 테니까. 이렇게 빨리 없어지다니, 사진이라도 남겨둘 걸 하며 아쉬워하다가, 나보고 글로라도 남겨보라고 하였다. 이것이 내가 사라져간 남편의 고향, 삼십 년 가까이 보아왔던 시댁 마을에 대해 쓰게 된 연유이다.

 선둘넘은 '선돌 너머'로, 마을 앞에 우뚝 서있는 선돌, 그 너머란 뜻이다. 다행히 선돌은 아직 남아있지만 그 선돌을 경계로 도로 건너편은 이미 부지조성이 끝났다. 갓지질과 회미, 질고지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오랫동안 입으로 전해져온 말이라 받침도 갓인지, 갖인지, 갇인지 혹은 가찌질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관공서 문서엔 또 다르게 표기되었을 터이다. 도로 안쪽의 갈미, 가삼 들은 아직 남아있지만, 그 마저도 어찌될지 알 수 없다. 마을 앞이 이리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앞소지, 물탕골, 정골, 괴메골, 고치, 불뱅이바위, 당그래미, 어벙골, 고개너머, 삼박고개, 달집만디 등, 듣기만 해도 고향 생각이 날 것 같은 시댁 마을의 이런 지명들은 언제까지 남아있을까.

 대전의 내 고향 마을도 마찬가지다. 우리 고향은 삼십 년 전 내가 집을 떠나자마자 개발 바람이 불어 우리 집 근처만 빼고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개를 그슬려 잡고 그 뼈를 모아둔 곳이라서 붙여진 구장탄데, 언덕바지가 있던 재마루. 재마루의 언덕에는 꽃다지가 지천이었고, 해마다 대보름에는 쥐불을 놓아 꺼멓게 탄 자국이 남아있었다. 거기엔 막걸리나 사탕을 팔던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주전자를 들고 술심부름을 다녀오면서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좀 더 멀리 가면 애바우. 어렸을 때는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 행복이 있다고 말하네' 하는 칼 붓세의 시처럼 나도 애바우 산길을 따라 한 없이 걸어간 적이 있다. 산 너머엔 무언가 다른 것, 동화 속에서 본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을 한 환상의 성이랄지, 우뚝 솟은 도시의 건물이랄지 그런 게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가도 산길은 여전히 계속되고, 산 뒤엔 연이어 산 뿐. 나는 무서워져서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아아, 남들 따라 행복을 찾아 떠났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네.'

 그 막연히 바라던 도시가 이미 펼쳐져 밤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데, 아, 그러나 우리가 부르던 이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설령 그 이름을 기억한다 해도 똑 같이 평평해진 아스팔트 위에서 어디가 구장탄데고, 재마루고, 애바우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뒤늦게 시댁 마을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역시 막을 수도, 막을 명분도 없다. 땅값이 치솟아 마을은 윤택해졌다. 논 가운데 불쑥 솟은 원룸 건물이나, 마을에서 마주치는 동남아 근로자도 이젠 낯설지 않다. 다만 곧 사라지고 말 선둘넘이니, 회미뜰이니, 질고지니, 갓지질이니 하는 그 촌스럽고 아름답고 정다운 이름들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제 땅은 1, 2, 3 번호가 붙어서 거래될 것이고, 그리고 어쩌면 훗날 우리 인간도 철인 28호니 플래티넘 999호니 하는 메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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