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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의 패스워드
심수향 시인
2017년 04월 27일 (목) 20:03:31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그날 햇살은 참 맑고 눈부시었다. 전날부터 내린 비가 그치질 않더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는 그치고 일시에 무르녹는 봄 날씨로 변하였다. 시계는 투명하고 한강변 수양버들은 연두주렴을 내려놓은 듯 하늘거렸다. 나무들은 더욱 선명해지고 개나리 진달래꽃은 빗방울을 매달고 반짝거렸다. 선계가 따로 있을까 싶었다.

 조금 일찍 나서 마음에 두었던 전시회에 들렀다 가려고 시립미술관으로 향하였다. 파랗게 맑은 서울 하늘과 드문드문 남아 있는 낯익은 길과 교회와 대학의 건물들이 젊은 시절을 잠시 떠오르게 하였다.
 미술관에 도착해서 보니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전시는 끝나고 다른 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있었다. 실망해서 돌아 서는데 동행했던 딸이 팔짱을 끼며 덕수궁에 잠시 들르지 않겠느냐고 뜻을 물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무언가 나를 달랠 것이 필요했다.

 정동 교회로 내려가는 길목 작은 공원에 건물만큼 키를 늘인 백목련이 희디 흰 빛을 뚝뚝 흘리고 서 있었다. 그 주위로 나무 등걸에 푸른 이끼가 낀 키 큰 나무 몇 그루, 아래쪽에 정동 교회 100 년 탑과 교회 낮은 지붕이 보였다. 길 저쪽에 덕수궁 돌담과 휘어진 길이 보이고, 햇살의 기울기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즐거워지는 순간, 나는 낯설지 않은 낯선 시간의 문을 밀고 들어가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꼬집어 이것이다 할 행위나 사건도 아니고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분위기와 느낌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는 시간여행이 또 내게 온 것이다. 분명 나는 옛날 어느 시간에 이곳을 지나갔으리라.

 문득이라는 순간에 들어선 세상, 가슴이 두근거리고 후루루 몸이 떨려왔다. 그리고는 온 몸에 신명이 짚이는 듯 흥겨워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흐릿하게 드러나는 그곳엔 구체적인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렴풋 아주 커다란 나무와 붉은 벽돌 건물과 햇볕이 투명하게 느껴졌다.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고 생동감이 샘솟고 설렘이 일었다. 싱그럽고 두근거리는 시간 속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삼인칭 시점에서 흐름을 느끼고만 있었다 할까.

 봄꽃 한 상을 혼자 받은 최고의 기분으로 덕수궁을 돌아다녔다. 그날 서울은 며칠분 봄을 한꺼번에 다 차려놓은 것 같이 꽃들이 차례도 잊고 한꺼번에 피어 있었다. 석어당 곁의 오래 된 살구나무는 분홍 만개, 고종황제가 자주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는 정관헌 앞뒤로 개나리와 철쭉이 흐드러지고 중화전 뒤뜰의 백목련과 벚꽃, 석조전 앞 분수대 수양벚꽃은 꽃불이 터져 흘러내리는 것 같았고, 벚꽃 그늘에 가려버린 빛 부신 오얏 꽃이 서글프게도 잔칫상의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석조전 별관 뒤 작은 숲길에서 만난 앵두꽃과 색색 철쭉과 보랏빛 오랑캐꽃 언덕 그리고 숲을 벗어나면서 다시 개나리와 백목련 자목련 등, 내가 받은 생애 최고의 꽃 상이었다 할까.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게 된, 시간여행이라 이름붙일 만한 찰나의 체험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시간이 될 수 있었을까 반문해 본다. 사랑하는 딸이 옆에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충만한 설렘이 있었기에 나는 꽃을 감상한 것이 아니라, 꽃을 품어 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사는 시간은 어딘가에 저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 기억에만 저장되는 것이 아니고, 허공이나 함께 있었던 사람의 눈동자 어쩌면 나무나 햇살 그늘 그 모든 것에 저장되고 있을 거라고. 저장 된 모든 것들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의 패스워드에 한 순간 접속되면서, 옛 시간의 저장고 문이 스르르 열리어 그 안을 거닐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바람과 햇살과 그늘과 나무로 엮어진 패스워드는 도무지 알 길 없지만, 그날의 느낌은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하고 그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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