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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문재인(64) 대통령의 인생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인권변호사 시절과 '왕수석'이라 불리던 청와대 근무시절에서도 그는 늘 노 전 대통령 곁에 있었다. 문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계기도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상주역을 맡으며 마지막을 지킨 것에서 시작됐다. 이 때 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의리와 남자다움의 강한 인상을 남겼다.

# 흥남철수때 월남 가난한 유년시절 보내
문 대통령은 1953년 경남 거제에서 아버지 문용형씨와 어머니 강한옥씨 사이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도 흥남에서 시청 농업과장을 지내다 6·25 전쟁 '흥남 철수'때 월남했다. 문 대통령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가족과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문 대통령의 집안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부산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양말을 사 되파는 일을 했으나 사기를 당하고 빚만 잔뜩 졌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을 보면 "그것으로 아버지는 무너졌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이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문 대통령은 부산의 경남중·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중·고교 때 별명은 '문제아'였다는데 이름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지만 실제로 술·담배를 입에 대고 잦은 정학을 받은 '문제 학생'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노 전 대통령 서거 계기로 정계 입문
 19대 총선 부산 사상구에 출마 당선
 18대 대선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쓴잔
 민주당 대표 사직 후 20대 총선 1당 탈환
 이후 대세론 형성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

# 사법연수원 차석 수료 부산서 변호사 길
이후 대학 시절은 학내 유신 반대 시위를 이끌며 보냈다. 1975년 4월에는 직선제 총학생회를 출범시키고 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았다. 1975년 8월 강제징집으로 입대해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근무했다. 당시 여단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는데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이 때문에 선거기간 작은 논쟁이 일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1978년 군 제대 후 사법시험에 도전해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는 동안 계엄령 위반 등의 혐의로 또 다시 구속됐다. 2차 시험 합격소식은 유치장에서 들었다.

# 노 전 대통령과 첫 만남 인권변호 앞장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대통령은 시위 전력 탓에 원하던 판사의 길을 걷지 못하고 부산에서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이 때 '운명적'으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다. 첫 만남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동업을 결정했고,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며 당시 관행이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끊고 판·검사 접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 후보는 자서전 '운명'에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썼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정치에 나서자 그의 부산 조직을 도우면서도 본인은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결정된 뒤 부산선대위 본부장 자리를 맡아 노 전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후 문 대통령에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잇따라 맡기며 가장 가까이 지냈다. 왕수석 시절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탄핵 소추를 당했을 때는 변호사 자격으로 헌재에서 노 전 대통령을 변론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는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아 친노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문 대통령이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 당선되면서다. 그러나 제18대 대선에서는 박근혜 한나라당 후보에게 졌다.

# 노 전 대통령 탄핵 변론 맡기도
당 대표직을 맡았던 문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대표직을 사직하고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를 맛보았다. 이 때 손혜원·표창원·박주민·조응천·양향자·김병관 등 다양한 분야의 당외 전문가들을 적극 영입했다. 특히 지난 대선때 박근혜 캠프의 경제멘토로 불렸던 경제민주화의 전도사인 김종인 전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해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문재인 대세론'이 형성되기 시작해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올랐다. 곧바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 대선이 빨라졌고 보수층의 '주적논쟁' '안보관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호의 제19대 선장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됐다.  김잠출기자 uskjc@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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