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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생각으로는 요즈음은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이 예전에 비하여 적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데 다르게 말하자면 순수한 사랑이 적어진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청소년 시절에 들었던 노래인 것 같은데 '댄서의 순정'이라는 제목의 가요가 있었다. 도대체 댄서에게 순정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나 하나 싶었는데 그때는 어려서 인생의 '대극'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 사실 댄서이기에 순정이라는 것이 절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가사를 찬찬히 봤는데,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남자라서 모르는 것이기보다는 나이가 어려서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젊었을 전반기 인생에서와 나이든 후반기에서 그 모습이 다른 것이라고 느낀다. 후반기에서의 사랑은 젊었을 때처럼 가슴 뛰게 하면서 폭풍을 몰아치게 하는 식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젊었을 때가 달콤하다면 늙었을 때는 씁쓸하지만 그 맛이 사랑을 더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눈에서 보는 사랑에서 옮겨가서 무게가 이동된 사랑으로 아름다운 자태는 사라지고 어느 때는 미움만 남아있어서 거리가 높이 떨어져 있는 기러기 사랑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이가 들면 기러기 같이 자주 만날 수는 없는 것이라 해도 만나기는 만난다. 만난다는 것은 사실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벽과 의자도 거리를 좁혀 서로 닿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만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돌과 곤충 같은 것도 서로 밀집되어 있어 주위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세계로 초월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도 대상을 만날 수는 없다. 신은 밀집되어 환경에 결정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의 창조물이고 그에게 투명한 것이기에 상대를 만날 수 없다. 우리의 세계에서 서로 만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만이 만나 사랑할 수 있는 것임에도 보통 이런 초월을 자각하면서 사랑을 만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초월적인 순수한 사랑인 순정을 그대는 모른다고 노래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필자도 순정이나 초월을 그때 당시 알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는 후반기인생에서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을 보는 초로에서야 순정이 무엇이겠구나 하고 생각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젊었을 때 그 폭풍 같은 열정은 물론 순수한 것이기는 해도 눈앞의 것이다. 그리고 열정 혹은 격정은 분노 같은 것이어서 자주 자신을 잃게 만든다. 격정은 욕동이라서 그 욕동을 연금술에서는 유황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조잡한 유황, 진실한 유황으로 나눈다. 자아중심적인 이기적 욕동이 조잡한 유황으로 자기만족을 모르는 격정 같은 것이고 진실한 유황은 그 욕동에서 작업되고 재생되어 새롭게 전환된 욕동으로서 자아중심에서 무게이동이 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조잡한 욕동에서 '자기실현'으로 쓸 수 있는 열정으로 전환시키려는 것은 어느 수양방법에서나 중심적인 주제라고 한다. 불교 탄트라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수양에서는 이런 욕동의 감정을 얼마나 잘 전환시키느냐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고 또한 예술에서도 열정의 감정을 어떻게 잘 표현하여 형상화할 것인가는 창작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예술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댄서가 아닌가. 상업적인 댄서들도 모두 예능인이고 그 때나 지금이나 조잡한 욕동을 넘어 자기실현으로 재생될 수 있는가는 항상 문제인 것이 아닌가. 그 사이에 모두 관음증 그리고 노출증을 드러내는 스포트라이트가 오고가게 되는 것이며 조명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댄서이다. 아무리 저속한 상업주의에 마음대로 좌우되어 우리의 정서가 마비 타락되어 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보는 우리나 또한 댄서에게 순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전반기의 폭풍 같은 사랑을 지나 같이 살아온 나이든 배우자에게 지금 볼 수 있는 것이 젊었을 때는 몰랐던 깊이 흐르는 순정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후반기 인생에서의 부부는 사랑과 미움을 거쳐 고운 정 미운 정을 넘어서는 어떤 것들을 체험한다. 남녀란 그야말로 대극으로서 각기 자신안의 남성 여성인 아니무스 아니마를 투사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자아 그림자' 작업이 어느 정도 된 다음에야 자아를 넘는 자신안의 아니무스 아니마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기에 순정은 이런 저런 이유로 알기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 자신을 잘 볼 수 있어야 그 댄서의 순정 같은 우리의 본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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