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푸른 보리밭이 보인다. 길게 펼쳐지는 보리밭 위로 내 유년의 생활이 스케치 된다. 보리는 아직 덜 익었는데, 쌀은 바닥이 나고 먹을 것이 없어 살아가기가 가장 어려웠던 때가 이맘때였다. 그때는 한국전쟁을 겪은 뒤라 식량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 즘에 우리 집 부뚜막 맨 구석진 자리에는 까만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한 줌씩 덜어 담는 통이었다. 부엌 벽에는 하얀 창호지에 붓으로 힘 있게 눌러 쓴 "절미 저축" 이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 글귀에 충성을 하듯 아침저녁으로 쌀을 한 줌씩 집어넣었다. 쌀이 가득 차는 날이면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라도 주운 듯이 흐뭇한 미소가 새나왔다. 어린 눈에도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것만은 역력해 보여,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깨금발로 마당을 폴짝폴짝 뛰어다니기도 했다. 가끔 그 쌀은 하얀 광목천으로 된 자루에 담겨 시장으로 나갔다. 한번은 쌀이 천으로 바뀌어 왔다. 그 천으로 팔 없는 원피스를 만들어 주셨다. 손으로 만들었지만 재봉틀로 박은 듯이 흠잡을 데 없이 바늘땀이 고왔다. 흰 블라우스를 속에 받쳐 입고 학교에 가자, 선생님도 누가 만들었느냐고 물으시며 원피스를 꼼꼼히 살펴보셨다. 친구들도 교복 같다며 빙 둘러섰다. 원피스는 허리춤에 주름이 있어 작은 체구의 내가 입으면 찰랑찰랑 거렸다. 친구들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볼 때면 폭폭이 잡힌 치마의 주름처럼 내 마음도 한껏 여유로워졌다. 그것은 어린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혹 절미통에 담긴 쌀은 다른 곡식과 보태져 돈으로 바뀔 때도 있었다. 학교로 가는 우리 형제들에게 원고지나 도화지며 소소한 준비물이 되기도 했었다. 아침마다 방문 앞에서 어머니의 주머니를 열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어머니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주머니의 끈이 낡을 대로 낡아 갈아 끼우기까지 하였겠는가. 그만큼 아침마다 주머니 여닫기를 반복했다는 증거이다.
 지금은 어렵다 하여도 웬만하면 먹고 입는 것은 별 무리가 없다. 그때만 해도 어린 입들조차 마음대로 먹지 못하던 가정이 비일비재했다. 네 집 내 집 없이 얼마 안 되는 푼돈조차 떨어지면 이웃집으로 돈을 빌리러 다녔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씀씀이가 줄어들게 된다. 명품을 갖고 싶어 몇 년을 벼르고 별러 모처럼 날을 잡았다. 딸과 함께 백화점으로 향했다. 막상 가서 가격을 보면 가슴이 오그라들어 발이 저 먼저 슬그머니 매장 밖으로 향해진다. 딸아이는 그렇게 갖고 싶어 하면서 왜 사지 않고 나오느냐고 다그친다.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없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얼버무려 버렸다. 딸은 곧이들으려 하지도 않고, 입이 한 뼘이나 튀어나와서 이럴 것이면 아예 오지나 말지, 추운데 괜히 나왔다면서 화를 냈다.

 집에서 나올 때는 딸과 손을 잡고 나왔는데 돌아오는 길은 생 바람이 인다. 딸은 말도 안 하고 저만치 앞서서 간다.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 나는 같이 가자며 뒤에서 종종걸음을 치기가 예사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며 투덜댄다.

 속으로 너도 나 같은 세월을 살아봤다면 어떻게 갖고 싶다고 다 가질까. 먹고 입는 물질에 허기지던 때가 생각나 저절로 손이 작아지게 되는 것을 너는 아직 모르리라. 들어주는 이도 없는데 나 혼자 중얼중얼 거리며 걷는다. 

 세월이 앞서 저 만치 달아나버린 지금, 나는 고사하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여위었던 삶이 가슴에 소용돌이친다. 어머니는 절미통에 한줌의 곡식을 넣었을망정 오직 사랑채에 할아버지를 찾는 손님들께 정성을 다했으며, 권속들 챙기는데 전념을 다했다. 어머니는 옛날을 떠올리며 보리밥도 꿀처럼 달았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나물죽도 엄청나게 맛이 있었는데, 이제는 세상에서 맛난 음식이 한 가지도 없다고 하신다.

 돌아보면 절미통은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해 왔다. 그저 눈에 보이는 한줌의 곡식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정신력을 모은 통이었다. 그것이 불과 반세기전의 일이다. 함부로 한술의 밥도 버리지 말아야 하겠지만 가끔은 버려지기도 한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음식이 흔하다. 모임이라도 있는 날이면 밖에서 식사할 때가 잦다. 그러다 보니 밥통에 밥이 자연히 밀려나지 않을 수 없다. 며칠이 지나면 밥알이 마르고 색깔이 누렇게 변하면 아깝지만 어쩔 수없이 버려진다. 시골처럼 소나 개를 키우지 못하니 짐승 먹이로도 사용 못 하고 버려지기 일쑤다.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웠던 시대를 잊어버리는 것 같다.

 눈을 감으면 보리 밭 이랑 사이로 '삐삐 빼빼' 보리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들녘에는 아이들이 재잘댄다. 어느새 보리밭이 시끌벅적하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까만 절미통이 더욱 뚜렷하게 다가온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부뚜막의 절미통은 단순히 한 줌의 곡식을 담았던 그릇만이 아니었다. 내게 있어 삶의 지침서였고 마음의 양식을 갈무리한 저장고였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