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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와 담벼락마다 덩굴장미가 한창이다. 붉은 꽃은 보색인 초록 잎과 대비되어 더욱 순수하게 붉다. 맑고 깨끗한 얼굴. 오월이다.

 피천득 시인은 '오월'이란 수필에서 오월을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라고 표현하였다. 하고 많은 나이 중 왜 하필 스물한 살일까. 이른 봄의 꽃샘추위와 바람과 가뭄 같은 격랑의 소년기를 지나 필 꽃은 피고, 퍼질 잎은 온전히 퍼져 자라기 시작하는 때, 스물한 살은 어른의 세계로 막 걸음을 떼놓는 시기여서일까. 그 피어야할 꽃에 장미가 있다. 흔히 '오월 모란, 유월 장미'라 하고, 실제 '오월' 중에도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 수필이 대략 1959년에 발표되었고, 그 사이 기후의 변화 등을 헤아려보면 모란은 이미 사월에 피고 지고, 오월은 이제 장미의 달이다. 요즘 한창인 장미축제도 몇 해 전엔 유월 초에 시작하였지만, 요즘은 오월 하순에 마무리되는 편이다. 아마 금아 선생이 다시 오월에 관한 수필을 쓴다면 '오월은 장미의 달이다.'라고 하실 게 분명하다. 흔히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하는데, 꽃 중의 여왕인 장미야말로 오월에 걸맞는 꽃인 것이다.

 장미는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는 스물한 살처럼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여름의 문을 여는 꽃이다. 살며시 문을 여는 두근거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반짝거리는 꽃이다. 사랑의 꽃이고 낭만의 꽃이다.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라는 릴케의 시처럼 모순의 꽃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꽃 뒤에 숨은 날카로운 가시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장미는 그 안에 농염함과 풋풋함, 완숙과 미숙, 순수와 타락, 성스러움과 비속함, 무엇보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봉오리의 풋풋함과 꽃이 막 피기 시작할 때의 순결함,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의 농염함을 거쳐, 꽃이 질 때는 벚꽃이나 이팝 꽃처럼 미련 없이 하르륵 지는 것이 아니라 갈색으로 말라버려 추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실로 삶의 여러 국면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꽃이다.
 장미꽃 자체만이 아니라, 장미에 대한 태도도 모순적인 경우가 있다. '화왕계'에서 설총은 장미를 현명하고 어진 백두옹(할미꽃)과 대비하여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齒)를 지닌 가인(佳人)이라 하였으니 그 아름다움은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세조 때의 강희안은 '양화소록'이란 책에서 꽃을 품격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데, 매화나 국화 같이 군자의 도나 선비의 멋을 상징하는 꽃을 1등으로, 모란과 작약처럼 옛날부터 귀히 여기던 꽃을 2등으로, 장미는 복숭아나 석류꽃 등과 더불어 5등에 낙점하였다. 9중 5라, 얼추 중간 정도이니 간신으로 내몰리던 신라시대에 비하면 어느 정도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하겠다.

 그런데 꽃을 아름다움이 아닌 품격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 해도 장미는 결코 격이 떨어지지 않는다. 많은 꽃들이 담장 안에서 집안사람만을 위해 피고 지는 반면, 덩굴장미는 담 밖으로 드리워져 행인들이 마음껏 보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생활로 건조해진 눈이 이런 호사를 어떻게 누리랴, 오월의 장미가 아니라면. 이 천상의 손길, 무상의 보시. 그러니 장미는 미(美)와 더불어 덕(德)을 갖춘 꽃이기도 하다. 

 시댁 근처에 새롭게 이사 온 집이 있다. 이사 오기 전엔 빈터를 주차장으로 사용하여 좋았는데 울타리를 두르고 막아놓으니 저절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댁 가는 길에 보니 넓은 마당에 온통 꽃이 심어져 눈부시게 피어있었다. 작약, 사철채송화, 끈끈이대나물, 초롱꽃, 분홍달맞이꽃, 개양귀비, 디기탈리스, 그리고 연두색 울타리 펜스로 군데군데 수줍게 핀 덩굴장미들. 마당을 자신들만을 위한 텃밭이 아닌 남들 눈에도 즐거운 꽃밭으로 만들고, 그것을 담장 안에 가두지 않고 울타리 펜스를 둘러 밖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섬세함, 혹은 순수함이라니. 그게 설령 과시용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실컷 볼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오직 아름다움뿐인 오월의 장미꽃숭어리처럼.

 오, 장미. 오월의 장미. 눈부신 오월의 장미. 피천득의 '오월'을 '장미'란 제목으로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떤가. '장미는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루비가락지다. 장미는 앵두와 잘 익은 딸기의 빛이요 장미는 오월의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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