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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우리의 5월은 언제나 청춘예찬이나 신록예찬과 함께였다. 푸르름과 약동하는 힘, 미래에 대한 꿈과 함께 5월은 찬란함과 희망이었다. 1980년대 오월은 최루탄 가스와 휴교령 속에 우울함과 아픔의 연속이었다. 그 후 부모가 된 후에 맞은 5월은 늘 힘겹게 넘기던 '가정의 달'이었다.
 2009년 5월 23일, 간월산 공룡능선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의 뜻밖의 죽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그 후에 맞았던 5월은 '5.18과 봉하'로 갈음했다. 신록의 싱그러움을 만끽하는 대신 분노와 슬픔의 5월이었다. 그  5월이 올해는 벅찬 감동으로 되살아났다. 다소 낙관적인 미래도 보인다. 설레고 선한 웃음도 나왔다.

 대통령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고 눈빛은 확연히 빛났다. 결기를 보이면서도 전체적인 선한 아우라는 그대로였다. 믿음을 주는 편한 모습이었다. 소탈한 이웃이면서 절제를 잃지 않는 자세에 단호함과 냉정함, 엄격함도 보였다.
 바로 가슴 밑바닥에 내재된 측은지심,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기 때문으로 보였다. 대통령은 5·18기념식에서 울먹이는 유족에게 다가가 그의 아픔을 보듬었다. 세월호 기간제 교사의 순직을 인정해 '인간을 인간답게' 예우했다.
 조국, 김상조, 장하성의 발탁에 모두 감탄을 자아냈다. 피우진을 보고는 무릎을 쳤다. 강경화에 이르러선 멋지다는 말만 내뱉었다. 그래도 민주정부 10년을 보냈는데 그 정도 인재 풀이 없었으랴만. 놀라기만 한 자들은 그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몇몇은 다소 정치 과잉이라는 우려가 따르겠지만 5월 한 달간 대통령의 행보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이 기조로만 간다해도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회'는 일단 회복될 것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릴 적 어머니도 그랬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측은지심과 공감을 실천했다. 가진 것 없이 약하디 약한 존재였던 어머니는 측은지심을 제대로 실행했다. 70년대의 겨울, 우리 초가집에는 전라도, 충청도에서 온 인삼등짐장수, 잡화장수, 방물장수들이 몇날 며칠을 묵어가곤 했다. 그들은 낮에는 촌락을 돌며 방물을 팔고 해가 지면 둘레상에 함께 앉아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객지인들의 잠자리와 쉴 곳을 제공했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참빛, 동동구리미, 월남치마, 코고무신 등을 외상으로 가져가고 다음해 겨울에 쌀이나 보리로 되갚았다. 동짓날부터 이월 초하루 할만네까지 시주와 시주미 봉투를 절에 전하고 까치밥이나 까마귀 짚 밥을 대문 앞의 나무에 얹어 놓던 어머니. 알고보니 힘든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의 발로에서 나온 일상이었다. 재작년 프란치스코 교황도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다. 방송이나 지면을 통해 본 교황의 모습에 가슴이 절로 따뜻해졌다.

 공감(Empathy)은 안(en)과 고통이나 감정(pathos)의 합성어이다. 문자 그대로 안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감정을 의미한다. 이심전심, 불립문자, 염화시중의 미소. 한마디로 '맞장구'이다. 교황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세월호 추모 리본을 떼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관심 자체를 불편해 했지만 그는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라는 위로를 전하며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는 진정한 위안의 말도 했다.
 그랬던 5월을 이제 보낸다. 세월호의 4월과 광주의 5월에 이어 87년 6월을 기억한다. 저항과 항쟁의 몸짓을 하며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최루탄, 사과탄을 맞으며 전진하던 사람을 기억한다.'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념의 푯대를 떠올린다.

 4월도 가고 5월도 지났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왔다. 호국보훈의 영령 앞에 진영의 편가름이란 있을 수 없다. 그 분들이 보이신 조국 사랑의 참 뜻을 함께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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