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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문, 새벽을 깨우다
                                                                                      
주여옥
 
다잡지 않은 손놀림으로
스위치 하나 톡, 누르면
고집스런 문은 서로의 경계를 나눈다
 
삶이 들락거리던 빈 터
내남없이 자유로웠던 길
 
비밀의 선 하나가
약속의 순간에
신호음 따라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이다
 
새벽이 깨어날 때까지
너와 나
만날 수 없는 오랜 이별이어야 한다
 
반듯한 침묵으로 서서
우리 스스로
기다림을 배워야하는 것을
 

● 주여옥 시인- 울산 북구 농소 출생, 2004 '문학세계' 신인상 등단, 울산문인협회 회원, 울산시인협회 회원, 제15회 울산공단문학상 수상, 공단문학회 회장, 갈꽃문학 동인, 강남요양병원 근무.

▲ 최종두 시인
경계에 대한 개념을 두고 시인과 타 분야의 전문인이 갖는 심상은 어떻게 다를까? 2013년 벚꽃이 시나브로 떨어지며 날리던 어느 봄날이었다. 주여옥 시인이 첫 시집으로 펴낸 '곡선의 미소'에서 위의 시를 읽고 나서 잠시 깊은 상념에 빠진 적이 있었다. 경계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것이 화두가 되어 늘 경계가 갖는 참의미를 알기 위해서 파고들었지만 그에 대한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절박함의 엄숙한 순간을 경계에서 맞게 되는 한 인간의 종점의 경계. 남과 북을 갈라놓은 휴전선, 그런 것들이 무수히 떠오르는 경계에 대한 넓은 세계의 사유를 내 것으로 만들어 시에 반영하고 싶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여옥 시인은 일상에서 자동문을 자주 만나며 그 고집스런 자동문에게 서로의 경계를 나누고 있지 않는가? 또 반듯한 침묵으로 서서 스스로 기다림을 배우려하는 구도자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자세로 살고 있는 시인은 인생의 선배인 나를 정신면에서 추월하고 있기에 반듯한 시를 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새기게 됐다고 할까. 실상이 그렇다. 전라도를 지키며 버티고 서서 반듯한 시만을 남겼던 문병란 시인은 주여옥 시인을 자연과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우는 시인으로 평한 적이 있다. 동감이다. 주여옥 시인은 그와 같은 대지적 바탕에 뿌리를 박고 있는 시를 쓰기에 더 크고 넓은 세계에서 시를 건져내리라 믿는다. 최종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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