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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방어진 대왕암 공원은 입구부터 낯설었다. 훤히 뚫린 길. 자연과 인공 사이에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소나무들 사이 바다가 보이고 보랏빛 무꽃이 언뜻언뜻 숲과 바다를 밝히기 시작했다. 오월 숲이 더욱 투명해지고 새잎들이 반짝거리며 팔랑거렸다.

 군데군데 찔레꽃과 산딸기 꽃이 피어있는 소로가 오롯이 드러났다. 조금 내려가자 길이 가팔라지고 통나무를 옆으로 누인 계단이 나왔다. 몇 개 계단을 어렵사리 딛고 바닷가에 내려서자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몽돌 깔린 바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몽돌 밭에는 반질반질한 아기 주먹만 하거나, 어른 주먹만 한 몽돌들이 빼곡히 널려 있었다.

 파도가 한 번 밀리면 바다의 소리인지 돌의 소리인지 둥글고 매끄러운 차진 소리가 귀에 가득 들어찼다. 돌아서서 들으면 한 떼의 바다 갈매기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소곤거리는 연인들 속삭임 같기도 한 소리를 바다는 끝도 없이 뭍으로 올려 보내주고 있었다.

 그 여리고 친근한 소리 중에서 마음바닥을 흔들고 올라오는 울음, 그 울음의 현 같은 것이 몽돌 사이에서 진저리치는 소리를 나는 가장 먼저 들었다. 낮은 북소리와 쟁강거리는 작은 방울소리로 이루어진 떨림의 그 소리를.

 예닐곱 그 무렵 과수원 울타리 아랫길로 하교하던 초여름이거나 늦봄이거나 그때 나는 들었다. 재잘재잘 떠드는 친구들 사이로 파고든 낮고 먼 북소리와 그리고 날빛같이 섞여 있는 방울 소리를. 어린 마음을 쿵 내려앉게 한 그 소리, 예감은 적중하였다.
 신작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사루어진 페니실린 병과 타다 남은 주사기와 아직은 하얗게 쌓여 있던 재 무덤이 아침까지 함께 했던 동생의 부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후 동생의 이야기는 그 누구도 꺼낼 수 없는 금기어가 되었고, 나는 얼결에 막내가 되었다.
 그때 나는 팔 남매를 낳아서 단 두 남매를 건진 어머니를 이해할 나이는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동생은 늘 아팠다. 노란 머리카락과 가냘픈 몸으로 울음소리조차 가냘팠던 여동생. 어머니는 과수원 일과 동생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밥하는 언니들만 내 차지였다. 나는 동생이 때로 미웠고, 때로 부러웠다. 아프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양보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죽음을 알 나이도 아니었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이 기억들은 지극히 희미하고 멀다.
 하지만 무언지 모를 노란 빛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은 놀랍도록 선명하다. 그날 나는 어느 집에서 날아온 것인지도 모르는 북소리와 방울 소리를 동생과의 마지막 별사로 받아들였고, 이후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다. 우연히 날아온 그날의 나직했던 북소리 방울소리, 그것은 화해의 언어였다. 그렇게 동생이 떠나고 나는 오래 동생을 그리워했다.

 몽돌의 고운 소리를 듣기 위해 십 년도 더 전에 거제 학동과 여차 몽돌 해변을 찾았던 적이 있다. 친구와 밤 깊도록 웅크리고 들은 자그락거리던 그쪽몽돌의 소리는 축축했고 낯설었다. 굳이 들었다고 한다면 웅장했던 바위가 순한 몽돌이 되기까지 시간과 아픔과 길과 사연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방어진 이 몽돌바다는 어린 시절 다녀간 바다여서 그런가, 해변에 닿자마자 동생이 떠나던 날 들었던 그 북소리 방울소리가 준비도 없는 내게 날아와 전신을 흔들었다. 그리고 울음의 현이 진저리치는 소리가 종일 귓속에서 사운댔다.

 마음은 이미 싱그러운 오월 숲에 젖었던 그 마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니 몽돌 해안 연수원 쪽 언덕에 보랏빛 무꽃이 연보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알싸한 무맛 같은 동생에 대한 기억을 안고 허벅지게 핀 무꽃 언덕을 오래 바라보았다. 고운 바람에 슬리는 무꽃에 역광으로 날아든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등 뒤에서 오는 몽돌소리 들으며 한참 그렇게 서 있었다.

 가야지, 앞서간 일행을 좇아 대왕암 가는 계단을 힘겹게 오르다 몽돌 해안을 돌아다보았다. 가마득히 멀어져 있었다. 금색의 대왕암과 먼 수평선까지 이어진 방어진 바다 윤슬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숙이 눈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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