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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
                                                                                        
이기성

녹색과 검은 줄이 선명한 건 수박. 불광동의 수박. 어제 내가 들고 갔던 건 분명히 수박. 여류작가는 불광동에 살고. 하얀 발등에 뚝 떨어진 그것. 대낮의 붉은 피 철철 흘리는 그것. 얼룩덜룩 검은 녹색 태양 같은 것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것, 배꼽이 뚝 떨어진 수박. 메마른 보도블록 위를 지나 파란 대문을 넘어 여류작가는 담배를 피우고 있을까. 하품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뜨겁게 화를 내고 있을지도. 파란 대문 앞에서 붉은 혀에 쩍 금이 갔나. 녹색과 검은 줄이 선명한 건 수박, 이십 년 후의 수박. 그때에도 여류작가는 똑같은 표정으로 백지 위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파란 대문은 아직도 파랗고. 골목마다 둥그런 수박이 없지는 않고. 캄캄하게 굴러다니는 녹색의 시체들이 깔깔대는 불광동에서
 

● 이기성-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문학과 사회'에 '지하도 입구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등이 있다. 제60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 황지형 시인
여름은 보통(普通)수박을 먹는 계절입니다. 녹색과 검은 줄이 선명한 수박 한 통을 반으로 잘라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은 집은 아마도 없겠지요.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정도의 수박을 고르기 위해서 배꼽도 만져보고 꼭지의 상태도 살펴봅니다. 이십 년 후에는 연애시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박씨를 뱉지 않아도 될까요.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쪽으로 누가 칼집을 냅니다.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갖춘 수박은 빛을 경험하는 실재와 만나고 싶습니다. 시작과 끝에서 연결되는 새빨간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붉은 혀에 쩍 금이 갈지도 모르니까요. 배꼽이 넓고 꼭지가 마른 수박도 있습니다만 씨를 얼굴에 붙이면 평생을 마주하는 사람은 또 웃음꽃을 피우겠지요.
 붉은 피 철철 흘리며 그 집 앞 파란대문을 서성이는 동작을 수반하는 수박은 누굽니까? 녹색과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리듬에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연애시는 없을 테니까요. 같이 살아가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동작들은 대게 머리로 하는가요. 가슴으로 하는가요. 허리로 하는가요. 보통에 대한 현대인의 끌림에는 중간을 맞춘다는 것,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깨달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앞서지도 처지지도 않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연애시는 어찌 보면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겠지요. 자신의 뾰족한 순을 자르는 일상의 과정입니다. 이십 년 후에도 다시 되돌아 올 보통의 위대한 수박의 면면은 이제 여름에만 먹는 수박이 아닙니다. 시원한 수박을 토막 내어 냉장고에 넣어둡니다.
 삼각형으로 칼집을 넣은 수박을 숟가락으로 퍼 먹든지 화채를 만들어 먹든지 영양 성분은 변함이 없습니다. 수박은 수박일 뿐입니다. 황지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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