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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고산 옹기 마을의 옹기 박물관에 들렀다. 일상생활 속에 살림살이로 끼어 있던 옹기들이 그 시대를 떠올리는 예술작품으로 빛나고 있다. 물독, 콩나물시루, 물동이, 초병, 소줏고리 등 옹기로 만든 갖가지 부엌용품과 생활도구였던 제 역량을 한껏 나타낸다. 공모수상작 '옹기 달항아리'는 손잡이까지 달린 뚜껑을 얹고 자리해 있다. 허리통이 풍요롭게 풍만한 항아리는 햇볕과 바람을 불러들여 여한 없이 숙성한 된장 색깔이다. 간장이며 된장이 자연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던 독을 이해하고 있는 작가의 솜씨가 깊은 울림으로 돌아온다.

 사람의 마음을 마냥 편안하게 만드는 색깔의 옹기들이 질서정연하던 옛날 장독대는 여인들만의 고유 영역이었다. 규모가 그 집안의 살림 범위를 대변하고 식구들의 건강과 음식문화생활이 책임 지워져 있던 장독대는 여인들에게 정갈한 정성을 다해야 하는 성소 같은 장소였다. 층층시하의 어렵고도 호된 시집살이를 하던 며느리가, 그곳에서 윗대 조상님들로부터 내려오는 보물 같은 '씨간장'을 관리하라는 시어머니의 명을 받을 때는 북받치는 눈물의 감격으로 안아들었다. 마침내 그 집의 며느리로서 시어머니한테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지어 붙여준 '맛이꾸매 아지매' 별명. 어머니는 젓갈이며 장 종류와 김장 등 음식손맛이 유난히 좋았다. 특히 된장은 기막히게 맛있다고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딸 일곱 중의 귀한 외동아들로 떠받들려 성장한 아버지의 급한 성격을 곁에서 받아내는 일이 쉽기만 했을까. 그럴 때도 어머니는 말없이 장독대에 들어서서 장들을 이것저것 보살피다가 단지들을 말끔하게 씻어놓곤 했다. 어머니 얼굴은 어느새 가슴 속 생채기를 문질러낸 말간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40년 전 우리 신혼살림을 실은 트럭은 부산에서 마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트럭의 한구석에는 높이 20센티쯤 되는 작은 항아리 두 개가 뚜껑을 눌러 쓰고 앉아 있었다. 그 속에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담근 마지막 고추장과 된장이 담겨 있었다. 제 딴에는 양념단지라고, 방 두 칸짜리 전셋집 부엌문 앞에 김치단지와 나란히 우리 집 장독대로 군림하게 되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 앞을 청소할 때 똘똘하게 행세하는 앙증맞은 단지들을 꼭꼭 씻어주었다. 나의 옹기와 직접적인 관계 맺기의 시작이었다. 
 남편을 위하여 식사준비를 하며 조그마한 항아리에서 된장을 뜨다가도, 결혼 직전 세상을 바꿔 떠나신 어머니가 사무쳐 왔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참노라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도 그랬을 것 같다. 제주도 10년 귀양생활을 지내며 추사는 끊임없이 서울의 집에서 밑반찬들과 김치며 젓갈, 인절미 들을 보내오게 하며 음식에 대해 불평을 한다. 입는 것 먹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까다롭기도 했지만 추사는 서울의 집이 몹시도 그리웠으리라. '장과(장아찌)는 괜찮고 무우 장과는 또 변미하였습니다. 젓 무는 조금 쉬었으나 먹을 수 있겠습니다.' 쉬지 않고 서울 아내한테 한글 편지를 쓴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머나 먼 섬에서 아내와 가족이 보고 싶어 소통하는 방법을 음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빠르면 두 달이고 일곱 달씩 걸려서 온 음식을 받으면 환한 햇살 속의 장독대에서 저장식품들과 음식에 사용할 장 종류를 갈무리하는 아내의 쪽진 모습을 아득히 그려보았지 싶다. 

 옹기는 어디에서도 잘 어울린다. 시래기국을 끓이려고 배추나 무청 데친 것을 작은 옹기에 담아 싱크대에 놓으면 옛날의 정겨움을 자아내는 부엌의 장식 소품으로 다정하게 다가온다. 초록색 화초와 꽃들과도 천생의 연분처럼 어울린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볕바른 베란다에 고추장 단지와 장 단지를 놓고 난분과 화초분들을 배치하여 들꽃 꽂은 옹기약탕기라도 곁들이면 옛 시골집 우물가 작은 화단 같은 분위기가 아련하게 어린다. 아침마다 예쁜 화단으로 나가 단지뚜껑을 열어 햇빛을 쏘여주며 장에 손질을 하면 피어날 틈만 노리는 곰팡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자리를 옮기다가 부딪쳐 금이 가도 옹기는 냉큼 버림받지 않고 '귀먹은 항아리' 별칭을 얻으며 한결같은 대우를 받는다. 곡식이나 마른 식재료를 간직하는 저장 독이 되고 간수가 자연스럽게 빠지는 훌륭한 소금단지로 거듭난다. 아무리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다가도 물로 한 번 씻어 행주질을 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를 띠고 맑아진다. 거품 나는 세제 같은 건 애초에 필요치 않다. 번잡한 노력을 요할 줄도 모른다. 물 두세 바가지 끼얹어 주면 단박 반질반질 윤기를 낸다.    

 별로 때깔나지 않는 된장을 수더분하게 담고 앉아 있기도 하고 시장판의 국밥그릇으로 불려 다니면서도 옹기는 여일하게 소박하다. 그래서인가. 심수관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대단한 일가를 이룬 도자기 가문의 후예다. 조선 도공의 후손인 그는 한국을 찾아 그 어느 것도 아닌 옹기 만드는 법을 배우며 자신의 뿌리를 재발견한다. 장식용이 아닌 자주 쓰이는 그릇의 가치를 일깨움 받으며 옹기의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된다.   

 시대의 변화 따라 생활양식이 바뀌어 장독대가 냉장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려도 옹기는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옹기에는 무명치마 동여매고 인고의 세월로 살아낸 등 굽은 할머니 모습이 어른거리고 질긴 삶에 허리 휘청한 우리들 어머니의 긴 그림자가 스며있다. 거기에 저릿하도록 배어나는 건 질박한 삶의 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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