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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정신보건에서 여러 가지가 바뀌고 있다. 우선은 정신보건법이 개정되어 입원제도가 바뀌어 시행되고 있으며 또한 이제껏 지역사회에서 정신과환자의 사회복귀 같은 사업을 하던 정신건강증진센터가 정신건강복지센터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역사회 정신건강 자살예방 등 사업을 바뀐 정신보건법 하에서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정신보건법도 바꾸고 각 지역사회의 센터 명칭을 바꾸는 것으로 우리가 개선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느 곳을 향한 우리의 노력인 것인가. 새롭게 이름을 바꾸는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 지향하는 곳이 과거 지향했던 것들과 그렇게 다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오히려 과거의 혁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발견할 수 있는 전망과 지평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역사에서의 그들 고민이 오히려 더 근본적이었던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프랑스혁명 시대를 살았던 정신과의사 피넬이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묶여있던 정신과환자 80명의 쇠사슬을 풀게 닥터오더를 내린 것은 1796년인데 이것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7년 후이며 혁명으로서 인연이 되어 1793년 파리 Bicetre 병원 선임의사가 된지 3년 후에야 의사로서 오더를 내릴 수 있게 된다. 프랑스혁명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그가 클럽에 나가며 프랑스혁명에 공감을 가지고 또한 그곳에서의 친구들이 정부의 책임자가 되어 그가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는 기회가 없었더라면 그때의 정신과환자에 대한 혁신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싶다.

 시대의 변화가 같이 보조를 맞추어준 것이고, 사실은 그 병원에 임명되어 갔을 때 의사가 아닌 병동 실무자인 Pussin이 쇠사슬을 푸는 오더를 이미 내려 시행되고 있었고 그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병원 의사에 의한 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뿐 아니라 이웃 여러 나라의 염원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있었을 때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19세가 되던 해이고 헤겔의 여동생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좀 후에 피넬의 개혁적인 생각에 감명을 받고 그에게 동생을 치료받는 것을 생각한다. 그의 절친이며 유명한 시인인 휠덜린도 정신질환을 앓았는데 1803년 또 다른 친구인 셸링이 헤겔에게 휠덜린을 돌볼 수 있는 거처가 있는지 편지를 보내온다. 그는 적합한 거처가 없는 것 같다고 편지를 보내고 그 이후로는 다시 언급을 하지 않는다.

 휠덜린은 헌신적인 그의 가족들이 이후 30년 동안 보살피게 된다. 헤겔의 태도가 무관심이었을까.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는 사실 동생도 정신 질환이었고 그래서 깊이 충격을 받은 것이며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유에 이르는 길을 찾은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철학은 자기분열과 부정 모순을 거쳐 휠덜린과 같이 화해와 조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휠덜린은 가족이 돌보는 탑 같은 집에서 시를 쓰면서 지냈지만 방문자와 정상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었으며 그를 본 사람들은 그가 자신 안에 유폐되어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도 그에겐 시라는 상상적 삶의 공간이 있었고 분열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화해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공간마저 없이 돌봐주는 가족도 없는 정신질환자들은 어떠했을까. 1700년대는 병원 또는 요양원에서 정신질환자를 쇠사슬로 묶는 것은 정상시술이었다.

 2017년 대한민국은 물론 엄청 다르다. 일부 환자에서 응급의 경우 억제대가 사용되어도 그것은 일시적으로 하는 시술이며 환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정신약물의 개발로 병동에 억제 되어야 하는 많은 환자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길은 멀다. 병동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삶의 터전에 뿌리를 내리면서 살아가는 일은 아직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받아주어야 하는 문제 등 숙제가 많은 것이다.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지향하는 것이 아마도 이런 일일 것이다. 병원에서 나와 지역사회로 돌아가는 소위 탈원화를 하려는 것으로 가장 근본적인 치료인 것이 아닌가. 우수한 약이 개발되어 증상을 가라앉히고 그래서 그들을 강박할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해도 지역사회 주민과 같이 있음이  이제껏 달성 못한 서로의 관계가능성을 드러나게 하지 못할 때는 그 환자가 사회생활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넬은 자신의 환자들을 쇠사슬로부터만 푼 것이 아니다. 환자들 치료 사례를 기록하며 치료의 성공 실패를 반성하였으며 치료하여 사회로 복귀시키려는 노력도 같이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지만 한 개인에 대한 보살핌과 그에 대한 반성 그리고 현실에서의 실천이 지금도 우리 염원인 자유를 실현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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