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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에서 자취를 할 때니 스물 대여섯 살 무렵의 일이다. 나는 일반 주택의 방 한 칸에 세를 들었는데, 어느 날 퇴근을 하고서 방문을 열었다가 거의 기절할 상황에 내몰렸다. 웬 물방개가 붕붕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말 안보태고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시커먼 갑충이 요란하게 내 얼굴을 스치고 날다가 창문에 붙었다 다시 날아다니곤 했다. 비명을 지르며 주인을 불렀더니 주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파리채를 몇 번 휘둘러 놈을 제압해서 집어내갔다. 내가 바퀴벌레란 것과 처음 대면한 순간이다. 사실 고향의 옛집에도 거미, 돈벌레, 노래기, 지네 같은 벌레들이 수시로 출몰했는데, 그래도 바퀴벌레는 없었다. 그래서 바퀴벌레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른 것이다.

 그날 이후, 벌레에 대해 별 감정이 없던 나도 바퀴벌레만큼은 끔찍스러워하게 되었다.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르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했을 때, 그 벌레가 바퀴벌레를 닮은 커다란 갑충인 것도 이해가 된다. 바퀴벌레는 사람들의 적개심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달포 전인가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친박계 의원들을 향해 '바퀴벌레 같다'고 비난을 하자 홍문종 의원이 '낮술 드셨냐'고 불쾌감을 드러냈다던데, 친박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그들을 다른 것도 아닌 하필 바퀴벌레에 빗대서가 아닐까 한다.

 납작한 몸통, 미끄러운 등판, 긴 더듬이, 커다란 알집, 배에서 나오는 점액질. 이런 바퀴벌레가 떼 지어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날쌔기는 또 얼마나 날쌘가. 최대 시속 150㎞ 까지 낼 수 있다니 시속 40㎞ 정도라는 우사인 볼트도 울고 갈 속도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인간이 바퀴에 대해 적의를 갖게 된 것은 그 생명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핵폭발 등으로 인류가 절멸해도 바퀴벌레는 살아남을 것이란다. 바퀴벌레는 머리카락이나 손톱까지 먹어치우는 엄청난 잡식성이며 공기가 없는 상태에서도 30분 정도 버틴다고 한다. 이러한 생존에서 우위를 점하는 능력 때문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우리는 바퀴벌레 뿐 아니라 다른 벌레에 대해서도 막연히 적개심을 갖거나 아주 하찮게 여긴다. 성별, 나이, 직업, 지역, 정치성향 등을 막론하고 혐오가 만연하는 시대에, 혐오의 대상을 벌레에 빗대는 표현이 넘쳐난다. 물론 예전에도 공부벌레니, 일벌레니, 책벌레니 해서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몰두하는 사람을 벌레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개인의 성향이고 특별히 혐오감이 드러나는 표현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새는 '~충(蟲)'이란 표현으로 한 집단 전체를 매도한다. 무뇌충, 의전충, 급식충, 한남충, 심지어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맘충이라고 하는 세상이다. '벌레 같은'을 넘어 '벌레만도 못한'이란 표현도 있다. 도저히 상종 못할 인간 망종이나 비참한 지경에 처했을 때 쓰는 말이다. '짐승만도 못한' 이란 말이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에 대한 윤리적 비난이라면, '벌레만도 못한'이란 말에는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얕잡아보는 '태도'적인 측면이 강하다. 하찮은 벌레보다 못하다는 경멸이 묻어나는 말인 것이다.

 벌레로선 좀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아까 바퀴의 경우처럼 인간보다 특출한 능력을 갖거나, 도움이 되는 벌레도 아주 많다. 아름다운 비단실을 선사하는 누에도 벌레이고, 딸기우유나 립스틱의 붉은 염료를 추출하는 연지벌레도 벌레이고, 황남대총에서 나온 말안장가리개를 장식한 비단벌레도 벌레이다.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을 분해해서 환경에 도움을 주는 벌레도 있다고 한다. <설국열차>에 나오는 바퀴벌레 양갱처럼 미래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벌레가 가장 유력하다. 이른 아침에 논에 나가면 볏잎 사이에 쳐놓은 거미줄을 볼 수 있는데, 이슬이 맺힌 거미줄은 보석이 총총 달린 천상의 레이스 같다. 가을에 듣는 귀뚜라미나 쓰르라미 소리는 어떤가. 벌레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예술작품에는 넋을 잃게 하고, 우리를 고양시켜 세상은 살아갈만하다고 느끼게 하는 충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벌레는 '여러 무척추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그 범위가 너무나 넓다.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97퍼센트가 무척추동물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벌레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작고 기어 다니는 동물' 정도로 한정해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벌레는 개체수로나 능력으로나 인간이 어떻게 해볼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그저 세 치 혀로 벌레를 놀림거리로 만들고 손가락을 눌러 쉽게 죽이지만, 인간이 죽어 땅에 묻혔을 때는 말 그대로 벌레의 '밥'이 되고 만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사체로 넘쳐나는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벌레를 다르게, 그러니까 바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 첫걸음은 '~충'이라는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걷어내는 일일 것이다. '~충'이란 말엔 이미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판단(그것도 왜곡된)이 들어가 있다. 이어지는 말이 고울 리가 없고, 그런 말이 만연하는 사회가 건강할 리가 없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 다리가 많아 징그럽게 생긴 돈벌레도 해충을 잡아먹는 이로운 벌레라지 않은가. 자연은 잡고 잡아먹히어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러면, 그렇다고 해도, 모기는? 파리는? 무엇보다 바퀴벌레는?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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