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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지럭꿈지럭 나아가는 시                                                                                  

유승도
 
호두나무 잎을 갉아먹고 자라난 밤나무산누에나방애벌레가 나무에서 내려와 고치 집을 지을 장소를 찾아 꿈지럭꿈지럭 힘차게 땅을 기어간다 집 뒤꼍에서 앞마당을 가로질러 뽕나무 아래로 헛간으로 원추리 이파리 위로 꿈지럭꿈지럭 줄지어 꿈지럭꿈지럭 녹색의 털가죽을 입고 몸속도 녹색으로 가득 채운 벌레가 꿈지럭꿈지럭 나방으로 탄생하는 찬란한 꿈을 안고 꿈지럭꿈지럭 간다
 다 잡아야 해요 내년에 갉아먹는 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요 마음 좋은 척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아내는 기어가는 벌레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나를 다그치지만 나는 벌레들을 굳이 죽이고 싶지 않다 호두를 수확하는 덴 지장이 많겠지만 시의 주인공들이 될 수도 있는데, 죽이고 나서의 느낌을 쓸 수도 있지만 꿈을 간직한 채 나아가는 자를 바라보면서 얻는 시가 좀 더 좋지 않겠나
 아내의 말을 흘러들으며 꿈지럭꿈지럭 마당을 가로지르는, 내 중지보다 커다란 시들을 바라보는 한낮
 

● 유승도- 충남 서천 출생. 199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차가운 웃음', '일방적 사랑', '천만년이 내린다'. 산문집 '촌사람으로 사는 즐거움', '고향은 있다', '수염 기르기', '산에 사는 사람은 산이 되고' 등.
 

▲ 황지형 시인

돈키호테의 꿈은 도처에 있는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인가요.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말을 인용해 봐요. 고통이 임계점에 다다른 현실의 밖으로 거뜬하고 풍족하게 꿈 여행을 떠나봅니다. 꿈꿀 동안 필요한 짐을 한가득 싣고서 일상과 동떨어진 상상을요. 이렇게 살다 죽는 삶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지 도무지 차별성을 느끼지 못할 때, 생각에 잠길 수 있게 혼자 떠나도 좋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불어내어도 좋겠지요. 여행에 필요한 어떤 짐이든 거뜬하게 담을 수 있죠. 욕심을 접고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접어보세요. 입이 떡하고 벌어질 겁니다. 그것조차 여유가 없다면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걸 즐겨보세요. 장바구니와 쇼핑백은 물론 식사, 의복, 대출 의뢰한 사랑까지 문제없이 담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만난 호두 앞으로 만나게 될 호두. 이 간극의 중간쯤에 다재다능한 꿈은 꿈지럭꿈지럭 나아갑니다. 때론 호두를 맛보러 온 청설모에게 가장 잘 익은 호두를 내어주는 시간이 따분하게 느껴지기고 합니다. 오직 소모와 고통이 충만한 육체적인 세계에서 꿈과 함께라면 결코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겠지요. 꿈을 꾸는 온전한 자유를 누구든지 누릴 수 있으니까요. 다른 생명체와 추돌이 예상되면 스스로 멈출 줄 알고, 현실과 동떨어진 꿈에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걸 방지할 줄도 압니다. 꿈은 진지한 눈빛으로 세상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활용하는 진지한 시간까지 만들어 냅니다. 세상에나 어떠한 현실에 처해 있어도 꿈지럭꿈지럭 목을 길게 빼고 나를 기다리는 꿈이 있다고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황지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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