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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를 지나고 며칠 상간에 윤오월로 들어섰다. 귀하게 찾아온 윤오월 덕분에 올 여름 더위는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겠다. 무덥고 긴 여름을 견뎌낼 여러 가지 궁리 중 가장 우선은 음식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준비 시간이 짧은 국수가 으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국수류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 국수는 다른 음식에 비해 밀려나 있다. 가끔 만나는 친구들이 국수나 한 그릇하자는 말이 나오면 눈길을 피하게 된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멸치국물 냄새가 국수라는 말끝에 따라와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만다.

 아주 가끔 잔치국수를 먹을 때가 있다. 크게 한 입 물고 힘을 주면 별 저항 없이 툭 툭 끊기어 흘러내리고 마는 국수 가락. 힘없이 끊기는 밀국수의 면발은 도전도 해 보기 전에 포기해버린 일같이 맥 빠진다. 무릇 음식이란 씹고 뜯고 맛볼 거리가 있어야 먹는 재미가 있는 법인데, 결기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는 국수는 만들기 쉬운 음식, 후루룩 삼키기 쉬운 음식이라는 매력 외 딱히 찾은 강점은 없다.

 어린 시절 과수원에서는 새참거리로 자주 국수 삶고 막걸리를 걸러 내었다. 국수 고명이래야 부추나물과 파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이 든 간장양념이 전부였다. 더운 여름엔 간장 한 종지 섞은 샘물 한 주전자와 막걸리 한 주전자를 들고 언니들 따라 과수원으로 내려가면 국수 바구니가 가장 먼저 환영을 받았다. 전쟁 후 모두가 다 어려운 때라 허기를 달랠 한 끼가 될 만해서 그렇게 반가워했던 걸까.

 인기 좋은 새참거리를 위해 어머니는 한 여름 볕 좋은 날을 받아 국수를 마련했다. 쨍한 볕 아래 하얀 국수가 빨래처럼 널린 방앗간 마당이 환하게 떠오른다. 50 상자 정도의 국수를 사랑 대청에 쌓아두고 시도 때도 없이 삶아 냈다. 국수가 끝물 되는 이듬해 장마철쯤 되면 좀 벌레 같은 작은 벌레가 국수에 생긴다. 국수 솥 가득 퍼져 오르는 거품 위에 거뭇거뭇 떠오르던 벌레도 반갑잖았지만, 이맘때 국수는 맛도 신통찮았다. 축축한 공기 속에 떠 있는 묵은 밀가루 냄새와 멸치국물의 날 비린내가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것도 싫었다.

 또 하나 대한민국 대표 면이라 일컬을 만한 라면, 참 미안하게도 이는 냄새조차 싫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설악산 대청봉으로 등산 한 적이 있다. 초행이라 길 안내가 필요하여 사하촌에서 포터를 한 명 구하였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소청봉을 넘어 봉정에서 일박할 예정이니 짐을 최소한 줄이라 하였다. 그때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라면을 친구들은 챙겼고, 나는 빵 하나와 사과 두 알을 챙겼다.

 문제는 산을 삼분의 이 정도 왔다는 포터의 말이 끝나고 얼마 후에 생겼다. 안개가 슬금슬금 덮이더니 주위가 삽시간에 부옇게 어두워졌다. 나뭇잎에 안개가 서리고 비처럼 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횡대로 손을 잡으라는 전달이 왔고 손잡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 순간 희미하게 눈앞을 가로 막는 돌 벽이 드러났다. 소청봉 바로 아래, 우리가 하룻밤 의탁할 희운각이었다.

 산속은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고, 불안과 추위에 떨던 일행은 라면을 끓여 한기와 주린 배를 채우고 이튿날 아침까지 해결했지만, 나는 남은 사과 한 알로 저녁을 해결하였고, 아침은 커피 한 잔으로 깔딱 고개라는 소청봉을 넘었다. 내처 깔깔딱 고개를 넘어 대청봉까지 올랐다. 다행히 청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점심 때 밥 한 술을 얻어 뜨고 무사히 하산하였다. 이 장황한 이야기는 몇 끼를 굶고 산행을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라면을 외면했던 유난한 나의 식성을 스스로 고발하고자하는 마음에서다.

 싫어하는 일, 싫어하는 음식, 싫어하는 사람…. 원인 없이 결과만 있을 리 있겠냐만, 좋고 싫은 것은 얽히고설킨 인연의 결과이리라.
 마흔 이후의 입맛은 옛날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입맛조차 그리움 쪽으로 돌아앉는데, 아직 나는 '싫다' 한 생각에 얽매여 호불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딱한 일이다.

 평생 입과 코에 충실하여 국수를 밀어냈지만, 이제부터는 머리와 가슴의 말에 귀 기울여 면류 음식에 기분 좋은 도전장을 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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