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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창섭
작품에는 영원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작품이 오랫동안 보존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이 없다는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뭉친 작가들이 요런 상투적인 생각을 그대로 받아드릴 리 없다. 현대미술이 이런 조류에 당연하게 참여하면서 예술무덤이라고 하는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을 작품이 넘쳐난다. 작품이 사라진다는 관념을 확고하게 가져도 어색한 시간이 아니다.  
 

▲ 자넷 에힐만, 하늘에 그린 그림, 가변설치, 캐나다 벤쿠버, 2014

 몸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100년 전에,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로는 200년 전에, 아름다운 풍경을 기억하기 위한 것은 대략 수백 년 전에 예술의 주제와 소재로써 효능과 매력을 상실했다. 무언가를 그럴듯하게 과장하거나 포장해서 보여주는 시대가 이미 100년 이상이나 지났다는 이야기다. 어정쩡하게 감상적인 분위기를 내던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실제와 가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가 왔다. 아날로그 감성마저도 감쪽같은 복제술 발달로 디지털이 정복해가고 있다. 21세기는 디지털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1900년대 사진술의 등장으로 닥쳤던 미술이라는 장르의 위기보다 몇 배나 심각한 시대가 된 것이다. 생존이 위태롭다. 그런데 이것은 미술계 그들만의 사정이다.

 보통사람은 미술에 별 관심이 없다. 뭔 쓸데없는 일에 돈쓰냐며 힐난도 심하다. 그나마 일부는 "그림은 아름다운 걸 그리는 것" 이 명제로 끝이다. 진짜처럼 보이게 그린('처럼'을 '진짜'로 오해하게 만드는 기술) 그림을 보면 엄지 척을 한다. 실재하지도 않는 풍경을 상상만으로 예쁘게 그린 그림도 좋아라한다. 그림에 좀 조예가 있다고 하는 이들은 인상파에 열광한다. 인상파 그림의 효력이 많이 상실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전시에는 많은 관람객이 모인다. 마음에 어떤 동요와 고민 없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사람들 사정일 뿐이다.

 공급자와 수요자가 처한 상황과 받아들이는 차원이 다르다. 공급자인 작가가 수요자인 감상자의 미적욕구에 맞출 리도 없지만, 맞춘다고 수요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의견합치를 보기에는 예전에 그른 일이다.
 자넷 에힐만은 90년대 초부터 거대한 그물을 공중에 펼치는 설치작업을 하던 작가였다. 지금은 예전의 작업에 디지털기술을 이용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첨단 현대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은 캐드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오토데스크가, 인터렉티브 예술지원은 구글이 지원하고, 재정적 후원은 벤쿠버 시와 여러 기관에서 받는다. 2014년 벤쿠버 항만에 펼친 거대한 그물은 하늘에 펼친 캔버스였다. 휴대폰으로 앱을 다운받아 조명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참가자 누구나 하늘에 빛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했다. 이 기술은 구글의 소프트웨어 팀이 후원했다. 몇 달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이 작품은 사라졌다. 다만 동영상과 사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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