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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완구 초대 민선 울산광역시장이 21일 서울에서 울산시의 광역시 승격 20주년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올해를 광역시승격 20년, 성년 울산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보다 울산은 1000년전 울주의 이름으로 동남권 중추도시로 자리했고 그 이전 신라 왕경의 배후 항만도시이자 국제무역항으로 세계와 함께한 도시였다. 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울산은 이제 현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며 글로벌 도시로서의 위상을 다져가고 있다.
본지는 창간 11주년을 맞아 울산의 장대한 역사와 함께 한 울산시림들의 이야기와 누구보다 울산을 사랑하는 울산인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I LOVE ULSAN'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는 울산인들의 울산사랑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보자. 편집자


심완구 초대 민선 울산광역시장은 "울산의 백만 시민 여망 하에 광역시 승격은 이루어졌다"고 했다.
 심 전 시장은 울산신문 창간 11주년과 울산의 광역시 승격 20주년을 기념한 특별인터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제가 울산시장 재임기간 광역시 승격을 이루어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며 "광역시 승격이야 말로 울산시민 모두의 소망이 성취이자 쟁취하는 바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울산에 태어나 자치단체장을 거치면서 시민의 여망을 안고 노력했을 따름"이라며 "시민들을 위해서 그 당시에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책임과 사명감을 다 했지 않는가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고향인 울산에 자주 가는 편인가?
-서울에 있으면서 울산도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잘 지낸다. 알다시피 나는 울산에서 태어나 울주와 남구에서 각각 12·13대 국회의원과 야당생활도 했다. 더불어 민선 초대 울산시장에 이어 2대 광역시장을  했기 때문에 누구 어느 지역구 국회의원 보다도 애정이 있다. 그래서 고향이고 지역구인 울산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다.
 
△울산광역시 20주년이 됐다. 심 시장 때 광역시로 승격했는데, 누구보다도 감회가 새로울 것으로 보인다. 광역시 승격 20주년을 맞은 소회는?
-울산인의 한 사람으로 광역시 승격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격스럽다. 울산은 산이 높고 바다가 가까우며, 중심에는 강이 흐르는 광활한 평야가 있는 그 야말로 농수산물이 풍부한 고장이다.
 저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울산시장과 국회의원했다는 것보다도, 울산에 태어나고 자란 시민의 입장에서 울산을 짊어지고 갈 미래세대를 위해서 기성세대의 책임을 다 했는가는 생각하게 된다. 울산이 1962년에 공업센터가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울산시민이 여망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피동적인 울산에 대한 혜택이였다면 혜택 이였고, 대한민국 전 국민에 대한 것이였다.

△울산이 광역시가 되기 전에는 어떠했나?
-적어도 1940년~1950년대에는 울산은 인구 8만의 도시였다. 그런데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 2월 3일 직접 참석한 가운데 울산에 공업단지가 들어섰다. 울산에 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된 것은 정말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박 대통령의 결단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산이 공업센터가 되면서 이익을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공해로 인해 삶의 질이 떨어지는 상대적 박탈감도 없지 않았다. 울산이 이렇게 생산이 많이 되는 공업센터로서 많은 역할을 했지만, 당시에는 공해로 환경이 나쁘고, 교육환경, 교통 등도 아주 열악했다.
 울산에 공장 하나를 더 세 울려고 해도 신청하기 위해 경남도의회까지 가야되는 복잡한 상황이기도 했다.
 

   
▲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청 개청 현판식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심완구 시장 등 내빈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당시 불가능했던 울산광역시 승격을 김영삼 정부의 실세들과 함께 이뤄어 내신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에 얽힌 비화나 숨은 이야기는 없나?
-울산의 광역시 승격 추진은 1990년대 초부터 울산상공회의소가 주관이 되어서 처음 울산대학교와 함께 시도했다.
 당시 언론과 환경단체 등 여러가지 환경 속에서 노력하고 해서 1990년 초중반에 범시민적인 하나의 외침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울산의 백만 시민 여망 하에 광역시 승격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당시 최고 국가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결단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 결단으로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행정개편까지 갈 수 있었다.
 오늘의 광역시 승격은 20년 전으로 생각하면, 저의 입장에서 역시 김영삼 대통령이 울산시민의 여망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단을 내려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1972년에 국회 본회의 발언에서 울산 공해문제에 이어 온산병까지 거론하기 시작했다. 울산이 공업단지가 된지 10년 만에 공해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당시 나는 최 전 장관이 공해 발언을 한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명 연설이였다는 것은 전문을 읽어 보고 알았다. 그러한 최 전 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당시 대통령이 될 때까지경좌 동영, 우 형우 라고 불렀다. 그 만큼 김영삼 대통위 입장에서는 최 장관이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1992년 12월 김영삼 정부 2차 개각에서 울산 출신인 최 의원이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 당시 내무부 장관은 광역시 승격에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 울산이 광역시가 되어야 된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심도 있었지만, 최 전 장관의 절대적인 하나의 소신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을 비롯해 야당까지 어떻게 해서든 반대를 많이 했다. 울산시민 입장에서는 공해에 시달리고 교통, 환경, 녹지 등 여러가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광역시 승격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벌인 시민적인 캠페인이 광역시 승격의 원동력이었다.
 광역시 승격 전과 후의 예산규모는 5배로 증가했고, 국고보조사업 12배 증가, 국가시행사업은 100배로 늘었다. 천지가 개벽하게 만든 것이 광역시 승격이다. 그러니까 울산의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광역시 승격이 문제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 포인트가 1997년 7월 15일이였다. 당시 시의회, 언론계, 노동계, 문화계, 울산청년회의소 등이 힘을 모았고, 각 지역에서 울산에 모인 각계각층 향우 회장단이 캠페인을 벌였다. 울산의 자생단체들이 하나같이 캠페인을 벌인 것이 광역시 승격 운동이었다. 여러 가지 절차에서 너무나 많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광역시 승격의 바탕은 100만 시민과 각계각층이 하나가 되어 이 길만이 살길이라고 외친 것이 결국 광역시를 성취해 냈다.

△경남도의회 승인을 얻기가 어려웠을 텐데.
-시민을 대표하는 울산시의원들도 하나같이 광역시 운동을 전개했고, 그 사람들의 여망도 아주 강열했다.
 그 당시 기초자치단체에서 울산 출신 경남도의원이 12명인가 13명과 함께 하게 됐다. 경남도의회 의원들은 울산이 광역시로  떨어져 나가면 세수가 줄어든다며 반대했다. 울산출신 도의원들이 광역시 승격을 위해 마산, 진해, 창원을 방문해 도의원들을 전부 다 만나 울산시민의 여망과 광역시 승격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특히 1996년 9월경 창녕에서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경남도의원 모두 다 끌어 모아 놓고 세미나를 열어 역설한 것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었다. 마산 출신인 강 사무총장이 그 자리에서 울산광역시 승격은 가슴 아픈 일이지 많은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이다. 광역시 승격을 시켜줘야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당의 당론이다. 그래서 울산광역시 승격은 경남도민들의 환영 하에 흔쾌히 광역시 승격을 시켜줄 수밖에 없다. 울산광역시가 승격됨으로 해서 경남도세가 준다. 그것은 정부가 책임지겠다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그 자리에는 또 저를 비롯해 울산 중구 출신 김태호 국회의원과 지역 도의원 모두 참석했었다.
 강 총장이 스피치를 하고 난 뒤에 나오면서 저하고 김태호 전 의원을 바라보며, 특히 저를 바라보고 "형님, 이 정도면 됐습니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그 말을 할 때 내가 눈물이 핑 돌았다.

△국회 통과는 상대적으로 쉬웠나?
-제가 12대~13대 국회의원 재임기간에 내무부 상임위를 거쳤다. 국회의 섭리를 잘 안다. 마침 15대 국회에서 울산 출신 이규정 국회의원의 상임위는 내무부과 위원이었다. 울산광역시 승격 안건이 도에서 통과되어 내무분과로 상정되면서 소위원를 구성해 심의가 시작됐다. 특히 김태호 의원의 상임위는 정무위 소속 이었는데, 이규정 의원이 김태호 의원 찾아가서 승격 법안이 국회 내무위에서 심사를 한다고 말했다. 또 광역시 승격은 울산시민 여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김태호 의원이 정무위원이었지만, 이규정 의원의 요청에 따라서 신한국당과 원내교섭단체 지도부에 전화를 걸어 정무위에서 내무위로 바꿨다.
 따라서 당시 집권여당이였던 김태호 의원이  내무부과 위원을 찾아 지방자치법상 과도적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광역시 승격을 시켜줄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이어 1996년 12월 28일에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그때 노동법하고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광역시 승격에 관한 법안은 본회의 이사 일정에 그해에 통과가 안 되게끔 의사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김태호 의원이 그해말 정기국회에서 통과시켜야 된다고 이사 일정 변경을 요청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원내 총무실에서 김태호 의원의 요구를 들어줌에 따라 이사 일정을 변경하게 됐다. 그리고 이날 여당만이 참석한 가운데 예산안을 통과할 때 광역시 승격안도 함께 통과했다.
 그래서 97년 7월 15일 울산에서 김영상 대통령이 참석 하에 테이프 커팅과 광역시 승격 기념식을 하고 현판도 달았다. 자랑스럽게도 제가 울산광역시장의 입장으로서 정중히 김영상 대통령을 모셨다.

△광역시 승격 이후에 달라진 울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광역시 승격이라는 것이 아주 울산의 역사를 변화시킨 일대 중대한 모멘트라고 생각한다. 울산 행정기관만이 울산을 산업도시라고 말하는 거 같다. '산업수도'라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최초로 말했다.
 하지만 산업수도라는 자부심을 가져봤자 공업센터를 만들기 전에는 국민 소득이 60달러가 채 안됐다. 그러나 지금은 3만달러에 가깝다. 서울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울산 때문에 대한민국이 이렇게 부강한지 아무도 모른다.
 울산을 바꾼 것은 1962년 울산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고, 두 번째는 광역시 승격 운동이 울산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울산이 변화하고 문화, 환경이 시설화가 되고 대한민국이 다 잘사는데 울산이 못산다는 것이 말이 되나.
 울산시민들의 욕심 같아서는 어느 도시와 농촌보다도 더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이 오늘의 울산시민의 입장이 아니겠나. 그 혜택이 광역시 승격였다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광역시 승격을 울산을 변화시킨 절대적인 하나의 계기였다.

△앞으로 울산광역시가 풀어야 할 과제는?
-오늘의 조선업이 잘 안되고, 현대자동차가 노사 분규등 여러 가지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광역시 승격 정신으로 함축해서 울산경제를 정말 살려야 되겠다.
 현대중공업의 노사분규 문제, 수주 문제 등과 현대자동차 문제도 해결을 하기 위해서 전 시민의 캠페인을 해야 한다.
 울산 경제가 회복되면 국가경제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울산시민 정신을 살린다고 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광역시 승격의 그러한 시민정신을 살리면 어떠한 어려운 점이 부딪힌다 하더라도 그것을 승화시킬 수 있다.
 광역시 승격의 엄청난 시민정신을 승화시킬 경우 당리당략, 이해관계, 여소야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등 각 이해관계가 다른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서울=조영재기자 uscyj@ 

-심완구 전 시장 프로필     △ 1957년 부산고등학교 졸업 △ 1961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학사 △ 1999년 울산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 신민당 총재비서관 △ 민주한국당 창당발기인 △ 민주한국당 중앙상임위원회 부의장 △ 통일민주당 사무차장 △ 통일민주당 원내부총무 △ 민주자유당 원내부총무 △ 한국전력 상임고문 △ 제22대 울산시장 △ 제1·2대 울산광역시장 △ 한나라당 당무위원 △ 새정치국민회의 울산광역시지부 지부장 △ 대한민국헌정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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