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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은 그냥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개념이 훌륭히 설명되고 묘사되어 그것을 읽고 지적 이해에 도달하였다고 해도 '심리적 이해'를 갖게 되어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어떤 지적 개념도 그런 개념만으로는 나에게 와서 정서적 이해가 될 수는 없는 것 같은 것이다.

 자신을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그리하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은 자아가 그 어떤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의 자기 고찰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근본적 이해란 자신이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되는 양식으로 그때마다 그 자신 무엇으로 자신을 선택했던 바로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해함은 자신을 하나의 가능성에로 '기획투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기획투사가 밝혀진 것 그 자체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밝혀내고 있는 한, 모든 이해함에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꿰뚫는 이해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됨의 특징은 존재이해이며 그렇게 볼 때 이해함은 자기 자신의 존재와 관계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존재와의 기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여는 존재개현을 통해 세계와의 관계가 일어나는 것이고 이런 개현의 정도가 세계와의 관계정도도 된다.

 만약 우리가 정서적 이해를 갖게 되며 그래서 마음이 열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곳 개현성의 장소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면 그와 일치하여 타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우리들은 김춘수의 시 '꽃'에서처럼 모두 무엇이 될 수 있다.

 김춘수는 그 시 첫 연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노래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를 맞이하지 못하고 그냥 눈앞의 그의 몸짓만을 관계할 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서 그냥 무조건적으로 관계를 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에서 의식화하는 것이며 그냥 눈앞의 몸짓인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에 이르기 위한 것일 것이다. 개현 속에 나타나는 존재자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존재자의 존재를 다른 타자와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고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에 대한 이해 속에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지금 이곳에서 개현되는 꽃이 된다고 할 때 그 투명한 이해의 지평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해는 존재와 같은 그러한 것을 비로소 처음으로 열어주거나 열어 밝히는 그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오직 이런 열어 밝혀져 있음 내에서만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서로에 대한 이해 속에서만 우리는 그에게로 또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심리적 이해는 비유하건데 이미 몸에 익혀져 몸에 뱄다고 하는 단계로서 불교에서는 혹 증득이라고 하는 경지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융 심리학에서는 그런 개념을 동화(assimilation) 시켰다고 하는데 동화 과정으로서 몸에 배게 하여 스스로 꽃이 되는 것이 아닌가. 몸에 동화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몸에 뱄을 때 하나의 눈짓 같은 것이 되는 것인지 모른다. 김춘수는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어떤 이해가 몸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명백한(explicit) 것이 아닌 묵계적인(implicit) 이해로 되는 것이고 알기는 알고 다 행동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눈치나 눈짓 같은 이해가 되는 것이다. 개념이전의 존재이해라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해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표상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삼인칭 눈앞의 이해가 아닌 일인칭(ready-to-hand)의 나와 동화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식으로서가 아닌 정서적 이해로 넘어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묵시적이고 암암리의 이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고 또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하게 된다.

 이런 대화 안에서 다른 인간과 함께 이야기 되고 있는 존재자의 존재를 나누면서 그 존재자들의 이름을 부름으로 하여 우리의 실존을 열어야 한다. 이 장소에서 치열하게 살고서야 그것도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가 생길 때가 많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는 한 사람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그런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알맞은 때를 맞이해서야 우리는 그 사람의 몸짓의 의미를 해석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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