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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수 MARK6 관악기 수리공방 대표

누구나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엔 무엇을 만들거나 고치는 일이 그랬다. 공부하라면 책상 앞에서 30분을 채 못 버텼지만, 장난감 조립을 시작하면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적성을 살려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됐고, 대학 졸업 후에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어릴 때 배우고 싶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포기했던 악기를 배웠다. 그러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목마름은 얄팍한 취미 생활로 쉽게 해갈되지 않았고, 나는 고심 끝에 직장을 관두고 색소폰 교습소를 차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적성을 살려 악기 수리와 판매도 겸해보라고 조언했다. 음악이 좋아서 시작했는데 음악 때문에 가난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악기 수리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이왕이면 미국으로 가서 제대로 공부할 작정이었는데 돌연 911 테러가 발생했다. 망설이던 차에 먼저 유학을 다녀온 친구가 일본행을 권했다. 일본에는 스쿨 브라스 밴드와 아마추어 연주자가 많다. 낮에는 학교나 직장에 다니고 저녁에는 밴드나 재즈 바에서 연주를 즐긴다. 아마추어라고 해도 실력과 열정은 프로 못지않다. 심지어 60~70대가 되어서도 반려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을 풍부하게 즐긴다. 그러다 보니 악기 수요도 많고 제조사도 다양하다. 악기가 고장 나면 수리, 교환하는 곳도 필요하니까 악기 수리점이 원활히 운영되고, 더불어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관악기 수리 전문학교도 많이 갖춰져 있다. 학교는 도쿄와 나고야, 그리고 오사카에 총 6개교가 있는데 외국학생에게 비자를 내어주는 학교는 두 군데가 전부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도쿄에 있는 학교의 입학허가서를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입학을 앞두고 일본어를 공부하던 중 다니게 될 학교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 악기 수리를 어느 정도 배우고 꾸준히 연구해왔기 때문에 드라이버 잡는 법 같은 기초를 다시 배우는 그곳의 진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그때 도제식 교육을 통해 악기 수리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었고, 그길로 선생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선생님은 전례 없는 외국인이며 언어적 장벽이 높다는 이유로 다섯 번의 거절 끝에 나를 제자로 받아 주셨다. 그는 일본의 저명한 악기 수리학교인 야마하 리페어 스쿨 출신으로, 30년 동안 악기를 수리해온 베테랑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5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에 단둘이 지내며 1년 동안 수업이 있는 날엔 7시간 가량 함께 공부하고 작업도 했다. 선생님이 운영하는 샵에서 손님의 악기를 받으면 곁에서 다양한 케이스의 현장경험을 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문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으며 오히려 선생님의 제자가 된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술을 전수받더라도 악기는 똑같이 고쳐지지 않는다. 또 수리하는 사람은 악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보다 손님의 마음을 더 잘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수리 기술 못지않게 손님의 악기나 음악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다루는 악기와 음악에 한층 가까워지기 위해 악기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요즘도 한가로운 시간에는 악기 연습을 꾸준히 한다. 
 공부하는 동안 나는 어렵게 얻은 배움의 기회이니 만큼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해내서 선생님께 잘 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열심히 한 결과물 앞에서 선생님은 번번이 다시 하라고 퇴짜를 놓으셨다.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이 학생이 너무 빨리 서두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사람마다 작업하는 방식과 속도가 다르다지만 공부할 때만큼은 정석대로 차근차근 배우길 원하셨다. 때문에 선생님이 수업중에 항상 이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 상, 천천히 해도 실수해요. 서두르지 마세요."

 내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지금도 일하다가 간혹 실수하게 되면 선생님 말씀이 언뜻언뜻 떠오른다.
 지금 수리 공방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취미로 악기를 배우는 분들이다. 그중에서도 은퇴 후 뒤늦게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시작한 분들이 많다. 그러니 더욱 악기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고, 실력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내게 악기를 맡겨도 좋을지 고민을 많이 하신다. 그런데 한 번 악기를 수리해 드리면 바뀐 악기 소리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인지 다음번에는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동호회 회원분들께 소개해 여럿이 함께 방문해주신다. 그럴 때면 악기를 맡기는 신뢰와 흡족한 칭찬 덕에 가슴에 뭉근한 감동이 인다.
 앞으로 이 일을 하면서 형편이 허락한다면 예전의 나처럼 악기를 배우고 싶은데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을 위해서 악기를 무상으로 대여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 무엇보다 악기를 배울 때 가장 부담되는 부분인 수리, 관리를 책임질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려고 힘들게 공부했다 생각하니 그간의 고생이 아깝지 않다.

 한 나라의 선진화를 진단하는 척도 중에 '재즈 지수'라는 것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재즈를 즐기느냐로 선진화 척도를 재는 것을 말한다. 재즈는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울림을 지향하는 음악이다. 재즈를 즐기기 위해서는 그만큼 영혼의 여유와 너그러움과 자유가 있어야 한다. 서두르며 사는 마음으로는 그 진가를 느낄 수 없다. 서두른다고 다 된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바삐 서두르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보다 나를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는 일을 찾는 데 좀 더 몰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내 손을 거친 악기를 통해 숨결이 아름다운 음악 될 때, 그들의 꿈과 열정, 그리고 삶의 여유와 행복이 거기 깃들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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