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꽈리를 불다                                                                                 

남효선
 
호박넝쿨을 걷다가 아내가 다홍빛 꽈리를 한 줌 따들었다 뜨거운 여름 내내 푸른 잎사귀를 너풀거리며 사방으로 손마디를 뻗힌 호박넝쿨에 숨어 꽈리는 용케도 노란 물빛 꽃을 피우고 종처럼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아내는 꽈리를 집게손으로 조심스럽게 뜯고 열매를 꺼낸다 잘 여문 앵두 같다 아내는 열매 속을 열어 속씨를 발기고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꽈리를 분다 어렸을 적 교문 앞에서 10원에 4개씩 하던 꽈리를 사 불었단다 아내의 입안에서 뽀드득하고 눈 밟는 소리가 난다
 
호박넝쿨을 걷다말고 아내는 입안에 꽈리를 오물거리며 삼십 년을 훌쩍 뒤돌아 유년으로 달린다 뽀드득, 아내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지난다
 
잘 익은 호박덩이와 함께 다홍빛 꽈리는 기숙학교로 떠나 휑한 아이 방 한 켠에 걸린다 텅 빈 방안이 금세 환해진다 아침, 텅 빈 아이 방을 열면 밤새 눈이 쌓이고 아이들 다홍빛 따뜻한 목소리로 눈밭을 뒹군다
 

● 남효선 시인-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했다. 198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돌게삼',  사화집 '길 위에서 길을 묻다', 민속지 공저 '도리깨질 끝나면 점심은 없다', '남자는 그물치고 여자는 모를 심고' 등이 있다. 현재 아시아뉴스통신 기자로 일하며 울진군축제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내와 남편은 밭에 있다. 나무 몇 그루 서 있고 아침 햇살에 하늘은 높아진다. 추수해야 할 농작물은 자기답게 채색을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밭은 온화함과 성남을 함께 숨기고 있다. 흙에 기대어 심고 뿌리고 거두는 일이라 여름에 겨울을 동경하는지도 모르겠다. 씨를 뿌리거나 가꾸지 않아도 밤하늘의 별을 닮은 꽈리 꽃이 피는 변수도 생긴다. 오랫동안 간직한 추억을 불러들이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곱게 말려져가는 아내라는 한 송이 꽃을 발견한다.

 


 남편은 아내의 몸짓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아내의 추억에 귀 기울여 들으며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고 입안에서 눈 밟는 소리까지 느낀다. 꼭꼭 눌러 밟아 천천히 보고 듣지 않는다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기숙학교로 떠나 휑한 아이들 방에 걸린 꽈리의 꽃말은 약함과 수줍음이다. 앞으로 나아갈 아이들의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남편과 아내는 꼭 필요한 만큼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는 아이의 방에 걸린 꽈리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을 것이다. 최고의 선물에 아이는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간다.
 서로를 챙기며 반환점을 돌아 온 아내와 남편은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술잔도 기울이며 마음속 이야기도 털어놓는다. 그 마음이 가을을 부른다. 황지형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