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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소설가는 갔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지나간 것처럼' 1905년 쥴·베르느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프랑스 파리의 신문이 실은 조사에 들어있는 구절이다. 베르느만이 아닐 것이다. 누가 죽음을 당하면서 쓸쓸함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석학 이어령 교수는 현대예술은 왜 고독해야하는가? 하고 당연한 현상인양 적어놓은 적이 있다. 아예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가는 못 견딜 정도로 고독함을 경험한 이후에 이르러 참다운 예술을 낳게 된다. 화가 이중섭이 가난과 고독한 가운데 명작을 낳았고 윤동주와 백석 시인도 그런 가운데 명시를 남겼다. 베르느가 세상을 떠나고나서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다음 공업도시 건설로 어수선하기만 하던 울산을 찾아 둥지를 튼 이척이란 무용인이 있었다.

무용계의 거장 장추하 선생에게 사사한 그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무용인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몸을 비틀며 춤사위를 내보이곤 했다. 여기다 그의 음성은 남자와 여자의 중간 음성 같이 여길 정도였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그를 일부 사람들이 멀리하며 헐뜯기 시작했다. 고루하고 배타적인 시골 사람들이 흔히 나타내는 악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낯설어지기만 하는 울산이 이척에게는 무척 싫어지고 예술의 소양을 활짝 피우려던 계획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울리는 울산에서 이루려고 한 꿈만은 버리지 않았다. 저명한 예술인들이 고독하거나 또는 가난 속에서 명작을 남길 수 있었듯이 울산의 환경들이 자꾸만 싸늘하게 변해도 묵묵히 예술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속쓰린 쓰라림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가 쏟아내는 아픔을 달래줄 여력이 없었던 나도 고향에서의 허전함이 쌓이고 있을 때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기에 오늘날 한국무용계의 기둥이 되고 있는 제자들을 길렀던 것이다.

현숙희, 김미자, 박선영, 강화자, 이미정이 그들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제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실하나를 밝혀두려 한다. 그 무렵 국제신문 기자로 활약하던 김상수란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나에 비해 일곱 살이나 많은 학교 선배였다. 뒤에 경상일보를 창간하여 초대사장으로 재임하므로 지역언론 발전에 이바지한 분이었다. 이척이 어려울 때 늘 격려해주며 따뜻이 맞아주는 그분을 찾아가 속사정을 털어놓게되었다. 김사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다방으로 나갔더니 벌써 김사장과 이척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어디를 같이 가자기에 따라나섰다. 가까운 은행으로 가는 것이었다. 거기서 김사장은 인출한 돈을 이척에게 건네주었다. 그때로서는 거금이었다. 그 돈은 이척이 무용학원을 내기 위해 건물주에게 줘야할 돈이었다. 이척이 계약금과 중도금을 물었으나 나머지 완납할 돈이었다. 김사장은 그 돈을 주면서 학원이 안정될 것으로 보이는 6개월 치 운영비를 주면서 갚을 생각은 말라고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박영출 문화원장이 일정기간 운영비를 지원하였고 또 그 뒤를 이어서 문화원 김규현 부원장이 장기간 운영비를 지원했던 것이다. 울산의 예술은 이와같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꽃을 피운 것이다. 이척은 그 때 결코 울산의 예술은 메말랐어도 인정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명을 바쳐 울산예술에 공헌했었다. 그가 간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갔어도 그의 향기는 남아있다. 아주 아름다운 항내를 풍기면서…. 김상수 사장님도 그렇다. 나는 그 후 김사장과 같이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어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이척과의 관계를 물어보았는데 그분의 대답은 이러했다.

"진주와 마산, 통영에 비해 울산이 뒤질 것이 없어도 문화예술의 풍토는 삭막하리만큼 메말라 있다.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해 한 예술가에게 조금 힘을 보탰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견인하기 위해 신문사를 만들려한다." 그때 창문을 내다보던 그분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분도 울산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신문이 없어 지역세에 밀리던 울산에 변변한 신문사를 세운 그는 분명 선구자였다.
 이척이 뿌린 예술의 향기는 어떤가? 일곱 살 적 아장걸음으로 그 학원을 오가며 이척의 자양분을 받은 박선영은 지금 울산무용인의 수장이 되어 오는 9월 14일 전국무용제를 준비하느라 바삐 뛰고 있다. 전체 회원들이 일심동체로 뛰고 있는 모습이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럽다. 문제는 시민들의 성원이다. 50년 전에 비해 이만큼 자란 울산의 예술을 확인하는 뜻에서도 개막식에 이어 9월 17일 울산대표로 참가하는 여의주 무용단의 공연에는 구름같은 시민의 발길이 문화예술회관으로 몰려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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