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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용현 학성지구대 순경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유형 1위는 자살, OECD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1위의 나라, 그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학교폭력으로 인한 자살이다.
 우리나라 학교폭력 가해율은 약 15%로 스웨덴 1.6%에 비해 약 10배 가까이 되는 수치다.
 과거 현재의 4-50대 때만해도 이런 일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학교란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육체적인 강자와, 육체적인 약자들이 나뉘어져 있었을망정, 강자라고 하여 약자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핍박하고 고통을 가하지는 않았다.

 소위 말하는 '노는' 친구들은 자기들만의 우정을 쌓아갔고, 또 다른 친구들은 또 그렇게 자신들만의 학창 시절을 꾸며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뉴스 등을 보면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여 수많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교 폭력으로 인한 자살, 10년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단어조차 낯설었지만, 현재는 익숙하기까지 한 단어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근절되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의 인식이다. 대부분의 가해 학생들은 학교 폭력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후 가해학생들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 물으면 대부분의 답변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그저 장난이었을 뿐이다' 라고 대답을 한다.
 그 장난으로 인해 누군가는 절벽으로 내몰리고 결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되고, 그 절벽으로 밀어버린 '장난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들은 간접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잘못은 잘못이나 그들에게도 '이 사람을 괴롭혀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고야 만들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을까? 아니다. 물론 이들의 잘못이지만 그들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다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장난'의 정도, 어디까지 해야 장난일까의 선을 정해주지 않는 사회의 잘못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왜 이들이 '장난'의 적정선에 대해 알지 못할까. 그것은 고통받는 상대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가해자의 입장만 알뿐, 피해자가 어떠한 고통을 겪는지 알지 못한다. 같은 괴롭힘을 지속적으로, 자신은 일상적으로 가했을 뿐인데, 어느 날 상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그때서야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뿐이다.
 그것이라도 깨닫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이 단지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단순한 처벌의 강화, 반복적인 교양은 옛날부터 반복되어왔고, 해왔던 일이다.
 어른들은 이러한 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 오는 것이다. 단순히 '그러면 안된다, 상대방이 고통스럽지 않느냐' 이러한 말만으로는 상대방이 겪는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러한 면에서 가해 학생이나, 피해 학생들이나 서로 공감을 할 수 있는 영화, 드라마, 웹툰 등이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최근 들어 인터넷에 '만화'를 올리는 웹툰 이라는 장르는 청소년들이 접하기 쉬우면서도 '고통받는 청소년들의 심리'를 학교 폭력을 가하는 자, 학교 폭력을 방관하는 자, 학교 폭력을 당하는 자, 모두에게 이러한 실상을 가하면서 바람직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 폭력은 단순히 '좋은 말만' 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역할극', '영화' 등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학생들에게 체험케해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본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반성하고 계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괴롭힘은 결단코 '장난'이 아닌 상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범죄임을 깨닫게 해 앞으로라도 불행한 일이 발생치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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