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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달리는 여름의 어깨 뒤에서 가을은 뚜벅뚜벅 오고 있었나 보다. 열어젖힌 새벽 창으로 밀려들어오는 서늘한 공기, 문득 올려다 본 아찔하도록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통해 가을은 서서히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반갑다.

 시간의 얼레는 내가 좋아하는 백일홍 꽃을 여기저기 피워 놓고, 봉숭아 채송화 끝물 모습을 초가을 풍경답게 풀어놓는다. 끌림이 좋다. 약속이나 한 듯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 여름 동안 게을렀던 생각을 풀가동하게 한다.

 기억이란 작용은 얼마나 신비한가. 사물 하나만 놓고 볼 때는 곱네 밉네 좋네 싫네 하는 느낌은 오지만, 추억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햇살과 바람과 기온과 주변이 내 경험과 유사한 상황에 놓여 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때의 사물은 사물이 아니라 추억을 몰고 오는 촉매제가 된다.

 여름을 지나오며 힘차게 영근 것들 가운데는 그리움을 부르는 것들이 지천이다. 덜 익은 사과, 벌레 먹은 석류, 초록 지친 풀잎, 마른 줄기 끝 푸른 달개비 꽃, 신라인의 미소 같은 강아지 풀. 차가워진 이슬 한 방울과 가을 햇살 한 줄기에도 어렴풋 그리운 이야기가 당겨온다.

 오늘 아침, 여름내 소식 없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거두절미, '조금 있다 아파트 아래 내려가 봐라' 친구의 전화가 끊기면서부터 나는 부산해진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수차례 반복 되는 친구의 정성을 받으라는 뜻이다. 볼일 보러 가시는 바깥양반 손에 뭔가 들려 보냈다는 말이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앞서지만, 아파트를 지나오는 자동차가 보이면 쑥스러움에 안절부절 서성이게 된다.

 받아 든 묵직한 보따리. 부부가 봄내 여름내 땀 흘려 지은 청정채소를 냉큼 받아들고 보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 양반 눈길 피하면서 서둘러 인사하고 '에이 이 친구, 왜 이리 많이도 보냈노' 중얼거리면서 자동차 문을 닫아 드린다. 

 친구의 보따리를 앞에 두고 한참은 푸근함에 젖는다. 그리고 여유롭게 보따리를 푼다. 친정어머니가 보내신 듯 넉넉한 정과 정성이 보따리 가득 차 있다. 싱싱한 애호박, 신선한 오이, 향긋한 깻잎, 풋풋한 열무김치, 풋고추, 장아찌, 쪽파 등 싱그러운 가을 들판이 식탁 위에 그대로 펼쳐진다. 그들에게서 뭔가 올라와 찌르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친구는 싱싱한 선물 한 보따리를 보낸 거지만, 그 보따리에 한 가득 추억이 따라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둥근 두레밥상에 먼저 가신 어머니 아버지 작은댁 할머니 할아버지가 웃으며 앉아 계시고, 타지에 가 있는 오빠 고모 종숙 종고모 친구들까지 왁자하니 옛 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짧게 짧게 동영상은 돌아가고 거실 가득 채워지는 가을 냄새. 고향 집에 돌아간 듯 긴장이 풀리고 노곤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다만 편안하다.

 한껏 회포를 풀었다고 짐작되는 시간이 흐르면 친구의 전화가 다시 온다. 열무김치는 언제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지, 멸치볶음은 여물게 볶아졌으니 꼭꼭 씹어 먹고 장아찌는 어디에 보관해야 하는지 엄명을 내린다.
 이것은 친구가 친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엄마가 어설픈 딸에게 하나하나 짚어주는 지혜의 말씀이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선물에 덤으로 금과옥조보다 더 값진 참 지혜를 얹어주는 것이다. 내가 사내처럼 밖으로 나도느라 놓친 살림살이를 살림 9단 능력자 친구가 나누어주는 배려다. 미안하고 염치없음은 잠시, 감동은 길다. 며칠은 가을 들판에서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며 식탁에 앉을 것이다. 단순 끼니를 때우는 식사가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밥 먹기가 될 것이다.

 평범하게 지나온 나의 일상들이 살뜰히 그리운 추억이 되리라고는 젊은 시절엔 몰랐다. 절절하게 그립고 꿈에라도 돌아가고픈 순간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함께 밥 먹고 함께 웃고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곤 했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것은 그리워해야지 해서 그리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 그리될 뿐이다. 행복은 크고 화려하고 기름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은 세월이다.

 덤덤하게 걸어가는 오늘 하루도 훗날 그러할 것이다. 이제는 고맙게 받고, 받을 것이다. 날마다 오는 오늘이란 선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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