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 대지를 밤낮으로 달구던 더위도 처서를 찍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다르다. 아파트가 밀집된 도회지와는 달리 주변이 산인 텃밭은 더한 것 같다. 더위에 지친 때문인지 가을은 이미 마음에 와 있었던 것 같고, 건조해지면서 거칠어진 손이 더 밉게 보인다. 부지깽이도 일손이 된다는 시골 농번기에 내 작은 손은 몇 사람 몫의 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손이 예쁘다는 말은 어린 시절부터 많이 듣고 살았는데 지금은 미운 손이 안쓰럽다 못해 서글픈 생각이 든다.

 텃밭 입구에 봉숭아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우스개처럼 여름이 끝나갈 무렵 지인들과 함께 텃밭에서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날을 잡았다. 여러 날 벼르다가 없는 시간 짬을 내었으니 대부분 흥분된 마음으로 모였다. 예쁘게 피어있는 진분홍 꽃잎을 따 절구에 찍어 차지게 만들었다. 한 시간 가량을 실온에 두고 숙성되길 기다렸다가 두어 시간 동안  손톱에 가지런히 얹었다. 제대로 진하게 물이 들 시간은 없어도 두어 시간 남짓 들인 물이 제법 붉은 색을 냈다. 지저분해지는 것이 싫어서 매니큐어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내 손톱은 늘 막일 하는 손 같다. 간간히 텃밭일도 하니 손톱 밑에 흙이 박히고 지저분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싶었다. 쉽게 지워지지 않으니 겨울이 오기까지는 제법 여성스러운 맛도 날 것 같다.

 언제였을까?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이웃에서 따온 봉숭아로 손톱에 꽃물을 들인 기억이 아련하다. 그리고 내 어린 날의 명경 같은 붉은 기억 한 컷, 어머니가 들여 준 봉숭아 꽃물이 발그레 떠오른다. 손톱보다 손가락이 더 벌겋게 물들었던 기억은 어린 날 어느 여름의 뜨거웠던 화인 같다. 작은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낮은 돌담의 버팀목을 하고 마당에 펼쳐진 덕석에 그늘까지 만들어주었다. 그 담장 밑에 가녀리게 핀 몇 그루 봉숭아가 아침저녁으로 눈을 맞추었다. 일상이 지치고 힘들어도 어머니는 꽃을 좋아했다.

 봄이 되면 이웃에서 꺾어 와 뿌리를 내린 키 큰 장미꽃이 활짝 피었고, 좁은 마당 귀퉁이에 피웠던 봉숭아는 썰렁했던 모녀의 마당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때도 아마 여름이 중순을 넘어서고 있었지 싶다. 한 여름의 뜨거웠던 볕이 시원해진 기분이 들 때, 어머니는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봉숭아 꽃잎 몇 장과 이파리 몇 개를 따서 왕소금을 넣고 돌에 짓이겼다. 작은 손톱 위에 올려 비닐을 씌운 다음 무명실로 싸매줬다. 싸맨 비닐을 답답함에 벗길까봐 일도 나가지 않고 조금만 참으라며 옆에서 지키고 앉아 꼼짝 달싹 못하게 했다.

 잠시도 등을 붙이지 못하는 당신이 그렇게 오랜 시간 일손을 놓고 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해가 마을 어귀에 걸쳐질 때까지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답답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낮 동안 일도 나가지 않고 긴 시간을 같이 있었던 당신에 대한 아늑했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손가락까지 붉게 물든 손을 보고 놀라서 큰 소리로 울었던 기억의 저편에서 어머니는 웃기만 했다. 당신이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꽃물을 들여 준 날이다. 손톱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던 기억은 있는데도 언제 희미하게 사라졌는지는 아득하다. 어머니와의 수많은 추억처럼 하나씩 희미하게 바래지고 당신은 조금씩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발가락까지 꽃물을 들이고 나니 맨발로 다니던 어머니의 망가진 발톱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바람을 몸으로 맞고 흙을 밟으며 산다. 일상이 신발에 흙을 담아 살다보니 씻느라 발은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있다. 흙과 물에 방치된 발은 얽고 발톱은 습하게 되어 모양이 제 각각이다. 나또한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고 사니 어머니는 오죽 할까 싶다. 내 발톱에 바른 봉숭아 꽃물이 왠지 희미해지는 것 같다. 당신이 평생 흙을 밟고 살았던 것처럼.

 흙과 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은 일에 지쳐 손톱도 다 닳았다. 살아온 시간만큼 마모되고 있는 손발톱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에 바르는 약 하나씩 사다 안기곤 한다. 왜 여태까지 어머니 손톱에 꽃물 한 번 들여 줄 생각을 못했을까? 엷게 물든 내 손톱을 보고 있으니 구순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때문에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다. 당신이 어찌 내 손톱에만 붉은 꽃물을 들여 주었을까, 살아온 매 순간 가슴이 뛰는 시간마다 내 삶이 꽃길이길 내 마음에 고운 꽃물이 들길 빌었으리라. 힘든 고비도 견디며 살아온 것이 이만큼 지나고 나서야 당신이 마음으로 물들게 한 꽃 길이었음을 깨닫는다. 텃밭에 남은 꽃잎 몇 장 따야겠다. 꽃잎에 푸른 잎도 보태어 백반에 천일염을 조금 넣고 작은 절구에 오래도록 곱게 빻아서 냉동실에 두어야겠다. 딸을 위해 나날이 꽃 뿌렸을 어머니께 가져가야겠다. 당신을 보고 오는 날에도 집으로 오기 위해 짐을 꾸리면 또 언제 올 것인지 묻는다. 언제나 그 물음 끝에 나만 당신의 기다림인 것 같아서 때론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그러나 힘든 당신의 삶에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는 등이 된다는 것은 다행이다. 아늑했던 유년의 기억을 더듬으며 마모된 당신의 손톱에도 고운 꽃물 들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포근해진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