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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한 관계기관 협의회가 열렸다. 예정에 없던 회의였고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이날 협의회에는 국토교통부, 문화재청, 한국수자원공사, 울산시가 참여했다. 지난 7월 문화재청의 생태제방 축조안 심의 부결로 반구대 암각화 보존 방안 마련에 실패하고, 식수전용 댐인 사연댐 취수 중단이라는 최악의 물 부족 사태까지 발생한 울산의 문제 해결을 위해 마련된 자리다.


취지는 좋았지만 막상 회의를 시작 하고보니 회의의 의도가 명확해졌다. 이날 회의는 수년 동안 뚜렷한 대안 없이 이어져 온 물문제에 대한 논쟁이 되풀이됐다. 문화재청의 대안은 그야말로 최악의 방안이었다. 이미 불가한 것으로 결론이 난 사연댐 수문설치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러면서 수위조절로 줄어드는 맑은 물은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대암댐을 용도전환하고, 청도 운문댐의 여유량을 활용하자고 했다.

되풀이되는 맑은물 대책이 국무조정실의 조정 회의 석상에서 또다시 낡은 레코드판처럼 돌아가는 형국이었다. 딱한 일이지만 반구대암각화 문제는 이제 물문제와 패키지 상품처럼 묶여 분리할 방법조차 잃어버리고 있다. 더구나 이날 회의에서는 새정부의 반구대암각화 보존 대책이 과거 정부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맑은물 대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울산시민의 식수댐인 사연댐에 물을 채우지 말라는 논리까지 이어져 최악의 상황까지 가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고 있다.

반구대암각화 보존과 울산의 맑은 물 공급 문제는 완전히 패키지 상품이 됐다. 결국 이 상품은 정부의 탁상행정에다 문화재청의 갑질, 문화재위원들의 고루한 사고방식과 문화유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빚은 세계문화유산사에 남을 참사로 기록될 지경에 이르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지역내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이 맑은물 대책을 여론화시키며 서명운동을 벌이는 형국이 됐고, 이를 정치 이슈화 하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에 화답을 하듯 정부와 문화재청은 맑은물 공급을 명분으로 이미 폐기처분된 안들을 다시 회의안건으로 올리고 울산의 식수댐을 비우라고 요구하고 있다. 반구대암각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대안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정치쟁점화 된 데 있다. 반구대암각화가 정치문제가 된 이후 본질은 사라지고 정치적 구호와 억지, 패거리 논리가 주류를 이뤘다.

급기야 정부와 문화재청은 백지화된 수문설치안을 재등장시켰고, 진전없는 맑은 물 공급 대책을 다시 언급하며, 낙동강 물은 먹지 않게 해달라는 울산에 낙동강 원수 사용료 지원을 제시했다. 울산의 청정수원 확보의 길을 막고 시민들의 건강권을 위협하는 정부의 이 같은 무책임한 태도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와 문화재청이 제시한 대안들이 10년이 넘는 반구대암각화 보존 논의 과정에서 무산됐거나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확인된 안이라는 점이다. 수문설치안은 수문을 통해 홍수나 폭우 등 긴급상황에 물을 신속하게 방류, 암각화가 물에 잠기는 것을 막는 것이다. 지난 2003년 암각화 보존방안이 수립될 때부터 거론됐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대암댐과 운문댐에서 맑은 물을 끌어오자는 계획도 현실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계획은 정부가 2009년 발표한 2025 전국수도정비 기본계획에 담긴 내용이다. 부족한 용수 12만t에 대해 울산권 맑은물 공급사업을 추진, 공업용수 전용댐인 대암댐을 생활용수로 전환해 5만t을 확보하고, 운문댐에서 7만t을 가져오자는 것이다. 운문댐의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대구권의 취수원을 구미로 옮기는 대구·경북권 맑은물 공급사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회의에 울산시가 심각한 물 부족 해결을 위해 요청했던 사연댐 수위조절 원상회복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심각한 사안이다. 문화재청은 사연댐 수위조절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울산시가 사용하는 낙동강 물 하루 3만t에 대한 이용부담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울산시가 수질이 좋지 않은 낙동강 원수를 공급받지 않기 위해 수위조절 폐지를 요구를 해 왔다는 점에서 문화재청의 이 같은 제안은 식수 부족난에 시달리는 울산 시민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울산시 관계자는 "수위조절안은 지역의 청정원수를 포기하고 수질이 낮은 낙동강 물을 계속 먹으라는 것으로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박했지만 정부나 문화재청은 어떤 물이든 먹으면 되는 것이라는 반응이다. 한마디로 울산시민의 식수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태도는 울산을 무시하는 문제와 다른 차원이다. 울산 시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문화재청이나 정부는 모르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동안 울산이 정부와 문화재청의 일방통행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정부의 억지주장에 확실한 태도를 보여야 할 시점이다. 본질을 간과한 문화재청의 인식이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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