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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한 남자를 본다. 암에 걸린 아내를 잃고, 뇌전증을 앓는 세 아들의 병원비로 전 재산을 고스란히 쓸어 넣고 지친 몸과 마음을 둘 데 없어 산에 들어가서 살고 있다. 오두막을 짓고 도토리를 주워 묵을 만들고 무, 배추 두어 이랑을 심어 김장을 담그면서 이 년째 살고 있는 남자는 한글을 잘 쓸 줄 모른다. 그는 냉장고 글씨를 어릿어릿하며 쓰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하나 남은 막내아들이 몹시 보고 싶은 심중을 보고십다로 쓴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고개를 숙이고 정성들여 쓰는 쉰다섯 남자의 모습이 착해서 눈물이 핑 돈다. 문물의 최첨단인 이 시대에 글자를 모른 채 험한 세상을 헤쳐 온 그의 삶이 오죽했을까. 나이도 많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자를 모르느냐며 무안도 많이 당했을 것이다.    


 우리 글, 한글을 몰라 처참했던 날이 내게 있다. 1957년 일곱 살의 나는 그 시절 '국민학교'였던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태극기를 처음 대하고 애국가와 학교종이 땡땡땡, 노래도 배우며 난생 처음 맞이한 국어시험 시간. 시험지의 오른쪽 맨 위에 ○학년 ○반 이름○○○의 빈칸에 숫자와 여러분의 이름을 쓰라고 선생님이 몇 번이나 설명하는데 나는 쓸 수가 없었다. 그 여러분 속엔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건 알아들었지만 내 이름을 쓸 줄 모를뿐더러 읽을 줄도 몰랐다. 동그라미 세 개는 하얗게 나를 올려다보는데 나는 눈앞이 깜깜했다. 
 이름 방미연. 내 이름 석 자를 넣어야 할 동그라미 안에 옆자리 친구의 시험지를 일어서서 들여다보며 따라 그려 넣었다. 글씨를 써 본 적 없으니 연필 쥔 손으로 괴발개발 그린 것이다. 옆의 친구는 이름 칸을 또박또박 잘도 채웠다. 1학년 12반도 거침없이 썼다. 
 "내 이름을 와 쓰노!" 방미연이 조그마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성을 냈다. 내가 그려 넣은 것이 글자, 방미연인 것을 그때 알았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시험지의 동그라미 안에 써야 할 글자가 '방미연'이 아닌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써넣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으므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절박함에 동그라미를 메워야 했다. 시험시간에 서로 바꾸어서 들어온 옆 반의 남자 선생님이 책상 사이로 다가왔다. "너 이름을 써야지, 왜 남의 이름을 써?" 선생님은 묵직한 음성으로 야단쳤다. 시험문제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격심한 수치감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흰 커튼을 양쪽으로 묶어 늘어뜨린 교실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은 지독히 따뜻했다. 그날의 봄볕이 그토록 무덥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귀한 외동아들이었으며 손주인 우리는 할아버지의 과중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야 했다. 손주를 곁에 두고 보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추상같은 강압에 의해 우리는 서너 살만 되면 부모님의 품에서 떼어져 시골집으로 보내졌다.
 오빠는 네 살에 갔는데 할아버지가 보내주지 않아 시골에서 6년간의 초등학교를 다닌 뒤 6학년이 끝나갈 무렵 가까스로 부산의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런 예가 있던 터이다 보니 어머니는 막 일곱 살이 된 나를 도시의 학교에 입학을 시켜야 한다고 할아버지께 애원했다. 어머니는 자식이 몹시도 그리웠던 것 같다. 적지에서 아군을 구출하듯 가까스로 나를 부산으로 데려온 것이 초등학교 입학식 이틀 전쯤이었을 것이다. 내겐 아직 낯설기만 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입학식에 간 학교 운동장에서, 눈이 휘둥그레지게 많은 아이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글바글한 모습에 놀란 나는 입학식 기간 일주일 내내 목을 빼고 울어댔다. 그러고 있는, 만 여섯 살이 채 안 된 내게 부모님은 이름 쓰기를 가르칠 경황이 없었으리라.
 어떻게 한글을 깨쳤는지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인데도 명문교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학교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력을 총평가 하는 일제고사시험을 바람 부는 운동장에서 치렀다. 2학년 전체 학생이 살벌하도록 엄격하게 좌우 1미터씩 사이를 띄우고 땅바닥에 앉아 치른 일제고사시험문제는 매우 어렵다는데 뜻밖에 내가 전체 1등을 했다. 각 반의 학생 수가 칠팔십 명씩이고 18반까지 있는 속에서 1등을 한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들 했다. 하지만 나는 1등에 대해 기쁘기보다는 담담했다. 글자를 다 알게 되어 '빈칸마다 글씨를 써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랐던 그날의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나는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일 것이다. 글자를 몰라서 생의 많은 면을 말없이 포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안다. 세종대왕은 한글반포에서 "한글은 칠 일이면 다 배울 수 있고 똑똑하면 반나절 만에 깨칠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시대에 50대이면서 세상살이가 얼마나 어렵고 가팔랐으면 그 배우기 쉬운 한글을 익힐 틈이 없었을까. 흙벽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산에 묻혀 사는 그에겐 세삼 글자공부가 필요하다. 산에 기대어 외따로 살아가려면 책을 사서 약초와 나무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남자는 한글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환하게 웃는다. 나라를 빼앗겨 일본말이 국어가 된 암흑의 시대에서 우리 한글을 굳건히 지켜준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한글이 목숨'이라 했던 말씀이 저 선량한 남자한테도 반드시 찾아갈 것 같다.
 익은 가을의 시월 달에 붉게 들어 있는 한글날이 습관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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