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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나 동물은 인간처럼 죽을 수 없다. 그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끝난다. 인간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죽는다. 단순히 끝나는 죽음이라면 사실 죽음에 대한 수업도 필요 없을 것이고 또한 그런 수업이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강물처럼 단순히 현재의 연속이기만 하다면 죽음은 아마도 식물처럼 어느 날 끝나는 그런 것 이상은 되지 못할 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에선 과거란 이제껏 존재해오던 바 현재의 과거로서 역사의 시간이며 미래는 나의 가능성으로 앞당겨 오는 것으로서 나 자신 밖으로 기획투사하는 실존의 시간이다.

 죽음은 그래서 우리 인간의 절대적 불가능의 가능성이다. 그렇기 때문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끝나는 것도 아니고 다 써서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임상적으로 우리가 어느 날 경험하는 사건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은 예컨대 의사처럼 많이 시신으로서의 죽음을 경험한다고 죽음에 대한 통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죽음은 삶의 종말이기는 하지만 삶속에서 매일 경험하는 죽음으로, 삶을 위한 죽음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죽음을 우리 삶에서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대개는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면서 자신이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알지 않으려고 한다. 말하자면 죽음을 부정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죽음으로부터 도피 혹은 외면의 정도는 그 만큼 인간의 존재개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자신이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자각은 사실 우리가 그 속에 빠져서 사는 대중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한다. 그들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여 고유한 자신이 되게 한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그와 같이 자신의 삶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할 것이다.
 우리의 생생한 삶에 죽음을 앞당겨 오는 일을 하지 않으면 삶이 부실해지는 것이다. 의사로서 경험하는 것인데 치매나 조현병이 치료되지 않고 많이 진행된 경우 생생함이 사라지면 본인이 곧 죽게 되어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는 절실함도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전망이 없는 삶은 끝없이 미루기만 하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그리하여 마치도 염소로부터 양을 찾아내듯이 비 본래적 대중적 타락한 삶으로부터 본래적 삶을 구별해준다. 물론 대중들도 "우리는 언젠가 죽어"라고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느 날 일어나는, 아직은 이곳에 없는 것으로, 또는 죽음을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것으로 설명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임을 숨기게 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이야기 하면서 죽음의 가치를 하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이데거 실존 철학에서는 우리가 태어난 것은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라고 하는데 태어난 과거가 미래의 가능성인 죽음을 통하여 현재로 연결되는 것을 던져짐(thrown)이라고 하여 그 제멋대로인 임의성의 상태를 표현한다. 제멋대로인 과거는 죽음으로 향한 존재를 통하여 인간 자신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던져짐에서 미래의 가능인 죽음을 앞당겨 자신으로 다가가면서 본래적 삶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필자의 조현병 환자 중에는 자신이 죽었다고 선고해달라고 하는 분이 계시다. 그렇게 죽음을 선고하실 수 있는 분은 신뿐이라고 응답하였는데 그가 죽음을 이해하는 태도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의사가 선고해주면 죽게 된다고 하는 망상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죽음은 그런 시간의 연속에서 어느 날 일어나는 '경험적' 사건인 것이 아니다. 의사로서 사망선고를 어느 날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녀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죽음의 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인 죽음을 향하는 자신의 '존재방식'인 것으로서 자신의 시야를 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죽음을 정면에서 도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는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예컨대 뱀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데 그런 대상이 없는 것이고 섬뜩한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불안이다. 하지만 이렇게 피하는 불안으로부터 대중에 숨어서 우리가 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저명한 융 분석가인 이부영 교수는 말한다. "사람들은 마치 청춘이 영원한 것처럼 행동한다. 불쾌한 것은 잊고 억압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내고들 있다. 친구와 동료와 가족마저도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뿔뿔이 헤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 아무 미련 없이 악수를 나누고 헤어질 수 있어야 한다. 삶이란 결국 그런 죽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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