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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웃음 
                                                            공광규
 

캄캄한 밤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 나와
옷을 홀딱 벗고 멱을 감는데
수 만개 눈동자들이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우리로 간 송아지와 염소와 노루와
풀잎과 나무에 깃들인 곤충과 새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깨어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나를
들판과 나무 위를 깝죽깝죽 옮겨 다니면서
웬 낯선 짐승인가? 궁금해 했던 것들이다
 
나는 저들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삼겹살로 접히는 뱃살이 창피하여
몸에 수건을 감고 얼른 방으로 뛰어가는데
 
깔깔깔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따라 온다
"얘들아, 꼬리가 앞에 달린 털 뽑힌 돼지 봤지?"
 

○작품 출처 :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3
○공광규 :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1986년 ≪동서문학≫ 등단. 시집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담장을 허물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등
 

가을이 벌써 발밑까지 다가왔다. 처음에는 뉴스 속 저 먼 곳에 있었지만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잠시 삶 속에서 몽환을 꿈꾸는 사이 황금벌판을 잡아먹으면서 발밑까지 도달했다.
 그리도 무성하던 저 벌판. 누가 뭐래도 일 년 내내 푸를 것만 같았는데 이젠 아니다. 하나

▲ 박성규 시인

둘 이빨 빠지듯 빠져 나가는 것을 보니 계절의 무상함을 어찌 말할 수 있으랴. 시월 중순 들어 겨울 먹을거리 준비에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다 보니 계절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조무래기 시절엔 등물도 하고 멱도 감고 지냈던 여름이었는데 시골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광경을 볼 수가 없으니 일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는 가을이 왔는데 어쩌면 이곳 시골의 모든 것들이 나를 보고 낯설어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추수를 하는 가을 논이 하루가 다르게 비워져 간다. 마치 털 뽑힌 돼지의 몸뚱이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공광규시인의 시골 풍경이나 지금 나의 시골 풍경이 다를 바 없지만 자꾸만 너털웃음이 나온다. 맑은 웃음이었으면 좋겠다.  박성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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