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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갱년기우울증이라고 불려 지기도 했었는데 중년이후 여성이 여성호르몬 등 신체변화와 가정과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의 변화로 인하여 가벼운 우울증상을 나타내어 병원에 오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최근에도 그런 분들이 역시 많은데 남편이 정년을 맞이하게 되는 쯤에 나타나는 우울증상으로 오는 경우도 눈에 띈다.

 그중 여러분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할까 자식 교육도 잘 되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며 남편은 비교적 성실한 가장이고 사회적으로 출세한 편이며 아내인 자신도 주부로서뿐 아니라 가정에 보탬이 되는 부분적 사회적 활동을 하였던 경우도 많았다.

 그녀들은 남편이 성공하도록 열심히 뒷바라지하며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정작 자신을 돌보는 시간은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그녀들 자신 공부를 잘 하고 그래서 주위의 칭찬을 많이 들었기 때문 자식들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에서 아마도 결백한 정도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 경우가 제법 많았다.

 그 어떤 소원이나 욕망의 성취는 상대적인 것이기에 결과에서는 만족될 수 있는 성취란 없을 것이다. 인간관계는 본래적으로 '존재이해'의 관계에서 형성되며 공감되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이런 존재이해의 관계에서는 인간은 물건처럼 대상화될 수 없다. 이에 비해 평균적인 인간의 타자와의 관계는 존재이해의 관계가 아닌, 소유적인  대상관계로서 자기이익 중심으로 타자를 마치 물건처럼 조종하는 관계로 '전락'할 수 있다고 한다. 외적 물적 잣대에서 성취를 바라볼 때는 소유하는 관계에서 넘어설 수가 없을 것 같다.

 자아중심에서 빠져나가기 힘들 것 같으며 비교하고 조종하고 다시 비교하며 또다시 욕구하게 되어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런 관계에서는 사회적 시선에 압도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욕망과 열등한 '그림자'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결백한 가짜 자기인 '페르소나'로 지내면서 자신의 미분화된 뿌리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미분화된 뿌리와 떨어져 있으면서 일방적으로 외적 기준에 자신을 완전히 맞추려고 할 때는 가짜인 '인형의 집'에서 우리의 생명을 제외시키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그림자를 숨기게 되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그림자를 살리는 삶을 몰아내게 되는 것으로서 억지로 인공적으로 사는 삶이 되고 공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잠적한 그림자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 외적 삶으로 어느 날 몰고 들어오며 그러면 그것은 강박적 불안이나 '마음에 꽂히는 꺼버릴' 수 없는 부정적 생각으로 자리 잡게도 된다.

 그녀들 중 어떤 이는 어릴 때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자기보다도 공부도 못하고 행동도 '올바르지' 못했었는데 외적으로 많이 성공한 남편과 부유한 집에서 호강하면서 지내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린이 같은 생각을 한다고 하면서 지워버리려 할 수도 있지만 어느 날 기분이 다운 될 때는 다시 그 생각 때문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머리에 꽂히는 것이 그들의 고통스러운 증상의 하나다.

 이것에는 그림자가 놓여있다. 그녀는 혹 '지적'으로 우월했는지 몰라도 자신 안에서의 '감정기능'에서는 좀 열등했는지 모른다. 그 열등한 감정기능이 그림자로 있기에 아마도 그녀의 친구에 대한 감정적 걸림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런 마음의 어둠을 작업한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고 보통은 그것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다. 자신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림자인 그녀의 친구는 그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해서이지 자신에게 필요해서 통합해야하는 자신의 일부분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미분화된 생명이다. 그것을 살려내면서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진다.

 우리가 찾는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그렇게 열심히 결백한 정도로 추구해온 일방적 성취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아직은 분화되지 않은 것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달려있는 것인지 모른다. 왜냐면 삶은 생명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닌 것이며 사실 행복이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삶 외의 어느 곳에 따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형의 집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사회적 역할로서의 페르소나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페르소나를 자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페르소나의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일상이 원래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다만 시간이 지나가봐야 그 일상이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는 일상에서 잘 잊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의미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그 어느 누구에겐 정말 절실한 하루라 할 때 그 하루도 사실은 일상이다. 그리고 파랑새는 그 일상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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