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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야기다. 예상대로 유네스코는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유네스코가 공개한 신규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한국과 중국은 지지하고, 일본은 반대했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일본은 '위안부는 강제연행 증거가 없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2007년 각의(국무회의) 결정에 근거해 등재 불가 입장을 천명하고 전방위 등재저지 운동에 나섰다. 위안부 기록물을 둘러싼 외교전은 중국이 2014년 6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단독 신청하면서 격화됐다. 당시 중국 정부는 "위안부 기록물이 진실하고 진귀하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하면서 일본이 역사 문제에서 수레를 거꾸로 몰아 침략 역사를 부인하고 미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유네스코의 실체였다. 일본 정부는 작년 10월 분담금 납부를 연기하면서 위안부 기록물 등재 저지에 나섰고, 올해 5월에도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정에서 이해 당사국 간 견해가 대립할 경우 사전협의를 권장하는 방안을 마련하자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분담금 납입을 보류했다. 일본의 공세에 시달린 IAC는 이번 회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등재 심사를 보류하는 권고안을 유네스코에 전달했고,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한국과 중국의 반발에도 이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동반 탈퇴하는 빌미를 만들어줬다는 평가를 받은 보코바 사무총장으로선 임기를 보름 앞두고 최대 후원국으로 부상한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의 민낯은 너무 많이 봐 왔기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을 너무 모른다는 느낌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세계 언론은 하나같이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을 찬양했다. 우리 언론은 특집에 다큐까지 만들어 찬양보도로 분칠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일명 '메이와쿠 문화'를 일본의 전통으로 소개하며 다양한 사례부터 과거의 예까지 언급했다.

과연 그럴까. 일본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배려의 나라라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은 남에게 폐를 끼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다. 자신을 위해 주인의 목을 따고 배를 가르는 것은 물론, 배신과 음모, 모략과 학대를 서슴지 않는 민족이 일본이다. 생수를 사기 위해 줄을 늘어선 모습을 화면으로 보여주고 '메이와쿠 문화'를 외치는 언론은 냄비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왜구들의 노략질과 조일전쟁의 참상, 일제강점기의 만행 등 모든 과거사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결과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내친 김에 역사 이야기를 해야겠다. 양심이 남은 몇몇 역사교과서 저술가들은 종군위안부를 역사교과서에 남겨뒀지만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한제국의 병합을 조선반도의 근대화 추진으로 미화하고 한일병합의 계기를 안중근 장군이 이토를 저격한 거사에 근거를 두고, 안 장군의 거사가 마치 병합의 원인인 것처럼 일본의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일본의 과거사에서 한반도는 언제나 자신들이 지배했던 땅으로 기술하고 이를 근거로 한반도에서 건네받은 문명의 산물을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양 거짓 교육을 하고 있다.

역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보태자면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는 '메이와쿠 문화'라는 것의 뿌리를 들춰보자. 기모노의 화려한 문양에 일본 하류문화가 분칠하고 있듯 메이와쿠의 뿌리도 '배려'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이 본격적인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한세기에 걸친 살벌하고 참혹한 내전의 결과다. 흔히 센고쿠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일본 열도의 민초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그 참혹한 한세기의 삶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바로 메이와쿠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칼 든 자의 말을 들어야 했고 항명이나 배신, 불복종은 바로 할복과 따돌림으로 이어졌다. 군웅할거에 종지부를 찍은 오다 노부가나 이후 노부가나 심복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는 막부의 질서가 그랬다.

유독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일본인들의 습성도 바로 스스로를 지키려는 삐뚤어진 자만과 상대를 얕보면 한없이 멸시하는 사무라이 문화가 낳은 산물이다. 그 삐뚤어진 문화가 오늘의 일본에게 역사 날조를 아무렇지 않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런 태도는 견지될 것으로 보인다. 아베가 사학비리로 정치적 위기에 몰릴 때 줄기차게 한반도의 위기설을 부각하고 일본인에게 피난 배낭을 준비 하라고 떠든 이유도 이쯤이면 알만하다. 이제 유네스코는 죽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 운운할 자격을 스스로 잃어버린 유네스코가 살 길은 일본의 민낯을 제대로 보고 호통을 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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