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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샤라쿠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인 1991년이었다. <일본의 예술> 시간에 샤라쿠를 조사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샤라쿠에 대해서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것이었다. 고대 사람도 아니고 18세기 인물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크게 의문을 품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 같다.

 그러다가 1998년 도쿄(東京)의 간다(神田) 고서점가에서 『또 한 명의 샤라쿠』(이영희저, 河出書房, 1996)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을 처음 손에 집어 들었을 때의 흥분과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 밤새도록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화가 김홍도가 샤라쿠라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전개와 정황 설명으로 인해 그 다음부터 내 머릿속에는 샤라쿠=김홍도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됐다.

 평생 그림에만 몰두한 김홍도가 현풍현감으로 재직했던 1794년에는 단 한 점의 작품이 없었다는 점과 1794년 어느 날 일본 에도(도쿄의 옛이름)에 나타나 10개월간 140여점을 그림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샤라쿠와는 묘한 상관관계가 생기는 것이다. 화풍을 비교해도 유사점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발가락이 6개인 부처님 그림이 두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로 짓펜샤잇쿠라는 작가가 1796년에 쓴 동화집이 있는데 현대일본어로도 뜻풀이가 안 되는 단어가 많은데, 이것을 우리 이두식으로 해석해 보면, 단원 김홍도가 왜 일본에 갔으며, 일본에서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그렸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을 알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김홍도는 당시 임금인 정조의 밀명을 받아 국사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1764년부터 30여 년간의 조선통신사왕래가 없어서 일본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에서 활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샤라쿠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는데, 샤라쿠를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독일의 우키요에(일본 근세시대의 풍속화) 연구가라고 한다. 그는 샤라쿠의 초상화야 말로 일본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했다.

 그 후로는 내 마음 속에 샤라쿠가 자리잡고 있어서 샤라쿠에 관한 자료가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 일본에서 1995년에 상영한 영화 <샤라쿠>를 비디오테이프로 구했을 때의 기쁨도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다가 2008년에 발행한 『색, 샤라쿠』(김재희저, 레드박스)를 읽고, 최근에 이 글을 쓰기위해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여전히 샤라쿠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장편소설 『색, 샤라쿠』에는 샤라쿠는 김홍도가 아니라 신윤복으로 설정한 점 또한 흥미로웠다. 신윤복은 김홍도를 스승으로 김홍도의 그림을 누구보다도 똑 같이 그려낼 수 있는 인물이었고,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아 신윤복을 밀사로 일본에 파견하기 위해 지어준 이름이 바로 '즐거움을 그린다'라는 뜻을 내포한 '샤라쿠'인 것이다.

 때는 1794년 일왕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에 의해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가 되고, 조선의 왕 정조는 1592년 임진왜란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고 위해 일본 정복 계획을 세운다. 정조는 폐쇄적인 일본 사회를 정탐하기 위해 김홍도로 하여금 그림에 능한 화공들을 간자로 양성하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추리소설답게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읽는 내내 당시 일본의 내로라하는 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 우타가와 도요쿠니, 당시 출판업계의 대부 츠타야 쥬사브로 등의 실존인물들을 집어넣어 그 리얼함을 한층 더 해갔다.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샤라쿠는 보내야하는 인물이 아니라 더욱 더 그 실체를 알아내야만 하는 인물로, 언젠가는 『또 한 명의 샤라쿠』를 번역해 보겠다는 의지가 굳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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